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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4.27 체벌 거부 선언문
에세이2018. 4. 27. 00:45

체벌 거부 선언



제 1부. 과거의 기억


1. 언쟁

대학교 새내기 시절의 일이었다. 꽤 시간이 지난 일이라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체벌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동기와 언쟁을 했다. 그는 자기가 ‘똑바로’ 큰 건 다 모부님의 엄한 매질 덕분이라며, 자식을 키울 때 체벌은 필수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폭력을 쓸 수 있냐고 다시 묻자, “너는 맞고 살지 않아서 잘 모르나보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그렇게 언쟁은 종결되었다.


2. 반증

그의 말이 틀렸다는 대답을 하지 못했던 건 무엇보다도 나의 모부를 욕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조숙했던 10년 전의 나는 앞에서는 맘에 없는 말로 어른들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뒤에서는 맘에 들지 않는 지시를 따르지 않는, 반항아와는 거리가 먼 청소년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부님을 사랑했고, 다른 어른들을 대할 때처럼 그들을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면 난 많이 맞았다. 그들이 나를 때리는 것은 훈육이지만 내가 때리는 것은 패륜이기 때문에 맞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마다 ‘감정 조절을 하는 능력은 내가 이겼다. 저 사람들은 참 한심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맞고 있었다. 그래서 맞고 살지 않아서 체벌을 반대하는구나 했던 동기의 말에 나도 많이 맞았다는 말로 반박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정에서의 체벌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 모부의 폭력성과 무능함을 전시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제 2부. 체벌과 훈육


1. 양육자로서의 권위

나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타자를 억압 혹은 통제하는 것이 권위라고 정의한다. 상대의 의사에 반한 권위 행사는 대부분의 경우 옳지 않고, 지양해야 한다. 하지만 양육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권위가 필요할 때가 있다. 피양육자가 거부하는 것이 피양육자에게 필수적인 일인 경우에는 양육자의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권위’라는 부정적인 개념의 필요성을 설명하는데 최근의 내 경험이 모순 해소의 고리가 되었으면 한다. 일주일 전에, 나와 동거하는 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서 실수를 했다. 발이 미끄러졌는지 그는 한동안 한쪽 발을 짚지 못하고 절뚝거리며 걸어다녔다. 발톱을 깎다가 내가 실수를 해서 피가 났을 때조차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을 짓는 고양이가 그렇게 아픈 티를 낼 정도이니 반드시 동물 병원에 가야했다. 하지만 영역동물인 고양이가 제 발로 병원에 갈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강자로서의 권위를 이용해 그의 신체적 자유를 억압하여 병원에 데려가야만 했다. 고양이와 동물 병원에 가는 것은 양육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피양육자가 싫어하는 행위를 강요하는 것이므로 일종의 권위 행사이기도 하다. 만약 같은 상황에서 의사 소통이 가능한 인간 아이를 양육하는 상황이었다면 먼저 대화를 시도했겠지만, 설득이 불가능하다면 어쩔 수 없이 양육자로서의 권위를 행사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양육자로서의 ‘권위’이다. 나에게 이 오염된 단어를 대체할 새로운 언어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2. 체벌의 불필요성

시간이 흘렀고, 나는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함으로써 피훈육자로만 살아오다가 훈육자가 되는 경험을 했다. 개인으로서의 내가 체벌 가해를 기피한다는 것을 차치하고, 당시의 경험은 체벌의 필요성에 대해 품던 의심을 체벌의 불필요성에 대한 확신으로 변하게 한 계기였다.


내가 상대했던 학생들은 초·중학생이었고 당연히, 내 말을 잘 따르지 않을 때도 많았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과정에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쪽의 말에 일방적으로 복종 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이니까. 그렇지만 제한적인 시간 동안 효율적인 학습 성취도를 이끌어내야 했던 학원 시스템 안에서 학부모가 기대하는 강사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교육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수업시간이었다. 나는 학생들이 교재를 소리내서 읽게 해야 했었다. 한 학생이 “하기 싫어요.”를 반복하며 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어서 나는 정색을 하며 낮고, 크고, 단호한 목소리로 “빨리 읽어.” 라고 말했다. 그 학생은 다소 겁을 먹은 표정을 하며 교재를 읽기 시작했다.


그 때 깨달았다. 나와 그 학생의 관계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 신체적 능력이 우위에 있는 사람과 약한 사람의 관계이므로 내가 무해함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하는 것이 학생에겐 크게 다가온다는 것을. 통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굳이 타인의 신체적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훈육자로서의 권위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3. 체벌은 폭력이 아니라 훈육이다?

제 1부에서 언급했던 언쟁 이후,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학교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2. 반증의 내용을 간략히 올렸었다. 그 게시글에 달린 댓글의 대부분은 “체벌은 폭력이 아니라 훈육이다.”라는 말도 안되는 내용이었다. 먼저, 체벌은 타인의 신체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폭력이 아닐 수가 없다. 둘째, 체벌이 훈육의 효과가 있는지도 불분명할 뿐더러 2. 체벌의 불필요성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체벌을 하지 않아도 훈육이 가능하다. 오히려 제 1부에서 알 수 있듯 체벌은 양육자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셋째, 훈육을 목적으로 체벌을 하는 것은 피훈육자에게 ‘맞을 짓을 하면 맞아도 싸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결국 폭력이 대물림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아마 내 또래들도 폭력을 정당화하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댓글을 달았을 것이다.


제 3부. 가해 거부 선언


나는 모부와 물리적으로 독립한 상태이며, 곧 경제적 독립을 이룬다. 따라서 현재의 나는 체벌 피해자가 될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앞으로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상태이다. 비청소년이자 비당사자의 위치에서 아수나로의 체벌 거부 공동행동에 참여하며 다음과 같은 선언을 남긴다.


        1. 나는 체벌을 하지 않을 것이다.

        2. 나는 체벌을 강요하는 구조를 거부한다.

        3. 나는 체벌 거부 운동을 포함한 청소년 인권운동에 연대한다.



2018년 4월

퍼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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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