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의 화제(?)인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읽고 울었다는 후기들을 많이 봐서 나도 눈물줄줄 할까봐 자기 전 침대 위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읽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 그저 화가 났다. 김지영 씨의 삶이 내가 살아온 삶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김지영 씨가 만난 여자들 중엔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쩌면 나의 삶보다 더 진보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지영 씨보다 열 댓 살은 어린데 말이다.
이내 막막해졌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이 김지영 씨의 삶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듯, 앞으로의 삶도 김지영 씨의 삶과 다르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지영 씨가 김지영 씨의 어머니와 별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듯, 김지영 씨의 딸도 김지영 씨와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에서, 시대속에서 애써 진보를 찾아보게 된다. 어려서부터 돈을 벌어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어야 했던 김지영 씨의 어머니와는 다르게 김지영 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 뿐이다. 세대가 교체된 것에 비해 너무 작은 변화이지 않은가.
답답하고 부당하고 나를 분노케 했던 김지영 씨의 연대기를 들은 사람들도 그 부조리를 인지하나, 본인이 부조리에 가담하고 있으며 그것에 맞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이 현실이다. 세상은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여성은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이 해방되지 않으면 개인의 해방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으로 지정된 사람들은 모두 삶의 어느 순간에 부조리를 깨닫고 좌절하는 순간을 겪게 될 것이다.
<참을 수 없는 '페미니스트'의 가벼움> 이라는 칼럼을 보고 많은 비판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이 글에 많은 위로를 받은 사람으로서 나의 생각을 풀어보고자 한다.
엠마 왓슨이 UN에서 "성평등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은 페미니스트이며, 꼭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말하는 연설을 들으며 나는 여러모로 동의했었다. 사정이 있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하더라도 성평등을 지향한다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하기에 충분하단 생각을 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려운) 페미니즘 도서를 많이 읽지 않아도, 집회에 나가지 않아도, 주변의 여성혐오적인 지인과 말싸움을 해서 시원하게 이기지 못해도, 지금 뼈를 깎는 다이어트를 하고 있더라도 선봉에서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심정적 지지를 보낸다면 나의 동지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본인의 실천이 충분치 않다 생각해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칭하는 걸 주저하지 않기를 바랐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허구적인 것이니까.
그런데 어디 가서 이런 말을 쉽사리 하고 다니진 못하겠다. 지금의 한국은 페미니즘 리부트를 맞았고 많은 사람들이 각성을 하고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는데, 인터넷 세계를 일상적으로 들락거리다 보면 이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맞긴 한가 싶은 글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 영페미 세대에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후에 페미니즘적인 말을 하는 게 유행이었다면, 요즘은 "나도 페미니스트지만..." 뒤에 반-페미니즘적인 말이 뒤따라온다.
"나는 페미니스트지만, 한남한남거리면 안된다고 생각해."
"나는 페미니스트인데,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주장하는거야.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는 메갈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나는 페미니스트인데 메갈과 같이 묶이기 싫어. 걔넨 잘못된 페미니스트잖아. 메갈이 페미니즘을 퇴보시켰어."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여성들이 피해받는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성혐오자라 생각해."
"페미니즘은 옳은데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을 잘못 배운 애들이 트위터같은 곳에서 여성우월주의적인 말들을 하더라."
놀랍게도 이 모든 말들은 최근에 내가 한 여초커뮤니티에서 읽은 글과 댓글들의 내용이다. (절 오프라인에서 만나신다면 캡쳐본을 보여드릴 수 있답니다.) 여성일 가능성이 높은,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혹은 페미니즘을 지향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들을 한다. 최근에 여혐별곡 대나무숲에도 비슷한 뉘앙스의 아무말이 올라왔었다. 댓글에서 많은 분들이 한남충이라 욕했지만 글쎄, 나는 그 사람이 여성이거나 심지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말과 안티-페미니스트들의 말은 그닥 다르지 않다. n명의 사람이 있으면 n개의 페미니즘이 있다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페미니스트가 맞을까?
이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 좀 더 페미니즘을 많이 접하고, 공부를 많이 한다면 과격한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던 내가 과격하단 소리를 듣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듯이 그들의 생각도 바뀔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과격함'에 주관적인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게 가능하다. 문제는 이 불쾌함이 실천이 되어 안티-페미니즘의 논리를 답습하였으나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고, 페미니스트 진영에 들어가 기계적 평등을 강요하며 페미니즘의 물결을 막아버리는 사람들이다. 아마 이 '문제'들이 진화하면 에쿼티 페미니스트가 되어 한남들이 원하는 '진정한 페미니스트'의 모델이 되어 줄 것이다.
나는 '진정한/올바른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스트로 불려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내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어쩌면 또다른 의미의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규정하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고민이 들던 차에 여성신문에 실린 이현재 교수의 칼럼을 읽었고, 이것은 나에게 많은 공감과 위로가 되었다.
사족 1. 여성신문 사이트에 이 칼럼이 저격하는 대상은 한국여성민우회, 워마드, 페미당당, 전국디바협회라는 댓글이 달렸다...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렇게 전유되어버릴 때가 많다. 자주 있는 일이라 화낼 필요까진 없고 그냥 비웃고 지나가면 될 것 같다.
사족 2.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위에서 예시로 든 것과 같은 빻은 글이 올라오면 반박하는 댓글이 많이는 아니지만 달리긴 달리고, 그 반박글엔 좋아요가 꽤 눌린단 것이다. 아마 남초였으면 "너 메갈이니?" 하는 댓글들이 달렸을 것이다.
나는 언니란 단어가 싫었다. 정확히는 '언니' 란 단어로 호칭되는 게 싫었다. '언니'는 손윗사람인 여자를 부르는, 나이주의와 성별이분법에 기반한 호칭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니'로 불리는 사람과 부르는 사람 사이에는 자연스레 나이권력에 따른 위계가 생긴다. 평등한 관계의 걸림돌이 되고, 개인간의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서로 이름을 부를 때와는 달라지게 된다. '언니'란 호칭을 정하는 과정에 반드시 서로의 나이를 알아야 하는 것도 싫었다. 내 나이를 밝히는 순간 어린애가 되어 상대방보다 낮은 위계에 있게 되고, 발화권력이 없어지는 경험을 많이 했다. 그 과정을 내가 겪는 것도 싫었고,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언니'라는 호칭이 싫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 호칭이 멸칭화 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다. 뭐라 해야할까.... 몇 년 전 꽤 오랫동안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호칭이 '언니'였던 것 같다. 그 때 난 스무 살이었는데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다들 날 '언니'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청년, 또는 중년의 여성들이었지만 가끔 나를 '언니'라 부르는 중년의 남성들도 있었다. 언니란 단어는 여성이 연장자 여성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만 생각했던 나는 일종의 컬쳐쇼크를 받고 '아 이것이 경기도의 문화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알고보니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은 대부분 언니로 불리고, 심지어 직업 호칭을 부를 수 있는 경우에도 존중의 의미를 소거한 호칭을 쓰고 싶은 경우엔 언니라고 불리더라. 성매매 업소의 성판매자들도 종종 '언니'로 불린다. ('언니들 상시대기' 같은 스팸을 본 적 없진 않을 것이다.) '아줌마', '아가씨'만큼 멸칭화 되진 않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가 '언니'란 단어도 그 정도의 멸칭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같은 단어라도, 다른 사람이 쓰면 청자인 내가 받게 되는 느낌이 다르단 걸 페미니스트 커뮤니티에 접촉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요즘은 '야성의 꽃다방'이라는 팟캐스트를 듣는데, 그 팟캐스트에서는 청취자를 '언니'라고 부르고 방송을 끝낼 때 "언니들, 안녕히." 하고 인사를 한다. 그 끝인사가 어찌나 따뜻하게 들리던지. "우리는 서로의 언니, 서로의 힘, 서로의 용기가 되어줄 거야." 라는 뒷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래, 생각해보면 이대 농성 당시 졸업생들이 들고 왔던 "언니 왔다." 피켓도 믿음직한 언니들이 있다는 든든한 느낌을 주었지.(나는 이대생이 아님에도.) 인터넷의 많은 여초 커뮤니티 회원들이 부르는 '언니'는 친근하고 다정했지.
여성을 지칭하는 호칭은 어떤 호칭이든 멸칭이 된다. 원래부터 비하의 의미였는지 존경의 의미였는지와는 상관없이.(아가씨, 마누라, 여사, ...) 언니라는 단어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원래 비하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은 단어였고, 최근에 나는 그 단어가 여성 연대의 존재를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단어로 쓰일 가능성을 보았다. 그렇다면 멸칭이 되었다고 해서 그 단어를 폐기하는 게 아니라 페미니스트들이 긍정적인 의미로 열심히 써서 단어를 되찾아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사족 : 이 글을 쓰면서 '언니'의 어원을 찾아봤는데 이 단어는 20세기 초반에 우리말 문헌에 처음 등장하고, 일본어의 아니(兄)에서 변형된 것이란 추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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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짧은 요약.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며,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 생각한다면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다.
'페미니즘'을 통해 남성은 자신을 괴롭히는, 성적 고정관념의 감옥을 탈출해야 합니다. 자신도 잘 모르는 '여성'을 정의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여성과 남성 모두가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선한 사람들의 침묵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없게 합니다.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의심이 들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세요. "내가 아니면,누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오늘 HeForShe 라는 캠페인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도움을 요청하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젠더 불평등을 끝내려면 모든 이가 참여해야합니다. 이런 캠페인은 UN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되도록 많은 남자와 소년들이 변화를 지지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만 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려 합니다.
저는 6개월 전에 UN Women의 친선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 발언하는 동안에, 여성 인권 운동이 남성 증오(Man-hating)와 동의어로 받아들여질 때가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식은 반드시 없어져야 합니다.
페미니즘의 사전적 정의는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한 권리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경제적 이론이며 사회의 성평등을 이루려는 이론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문을 품어 왔습니다.
제가 8살이었을 때, 저는 부모님들께 보여드리는 연극을 감독하려 했다는 이유로 ‘거만하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남자애들이 그랬으면 비난 받지 않았겠지요. 14살이었을 때, 저는 미디어에서 성적 대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5살이었을 때, 저의 여성 친구들은 근육질의 몸을 갖기 싫다는 이유로 속해있던 스포츠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8살 때, 저의 남성 친구들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고, 그래서 저는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어렵거나 복잡한 일이 아니었습니다.하지만 최근에 저는 ‘페미니즘’이 부정적인 단어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자들은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으려 합니다. 저는 기가 너무 세고, 너무 공격적이고, 독단적이고 반남성적이며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왜 ‘페미니즘’,’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그렇게 불편한 단어가 되었을까요?
저는 영국에서 태어났고, 같은 일을 했다면 저의 남성 동료들과 똑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신체에 대한 결정권이 있고, 여성들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성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저는 세계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나라는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도 성평등이 이뤄졌다 말할 수 없습니다. 여성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저는 운이 좋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제 삶은 정말로 특권입니다. 제 부모님이 딸이란 이유로 저를 덜 사랑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여자란 이유로 제가 무언가를 못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멘토님들이 어느날 제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이유로 제가 발전하지 못할 거라 단정짓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성평등 대사들이십니다.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자신도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페미니즘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세상을 바꿀 힘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페미니즘’ 이라는 단어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단어 그 자체가 아니라 단어에 담겨 있는 생각과 열정입니다. 모든 여자들이 제가 지금 누리는 권리들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통계적으로 봤을 때 거의 없을 것입니다.
1997년에 힐러리 클린턴이 베이징에서 여성인권에 대한 명연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슬프게도, 당시 클린턴이 바꾸고자 했던 것들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주목했던 점은 그 연설의 청중 중 남성은 30퍼센트도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절반만이 변화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남성 여러분, 저는 이 기회를 통해 여러분이 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성 평등은 당신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렸을 때, 부모로서 저희 아버지의 역할이 어머니의 역할에 비해 사회적으로 저평가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젊은 남성들이 정신병으로 고통받지만 ‘남자다워’보이지 않을까 봐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20대부터 40대 영국 남자들의 가장 큰 사망 원인은 차 사고도, 암도, 심장마비도 아닌 ‘자살’입니다. 남성의 성공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남성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남성 역시 성평등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자가 성적 고정관념에 갇혀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지 않지만 분명히 그런 현상은 존재합니다. 그들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면 자연스럽게 여성 역시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성이 공격적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면 여성들이 눈치 보고 복종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남성이 통제될 필요가 없다면 여성도 통제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젠더가 두 개의 대립되는 지향점이 아니라 스펙트럼과 같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아닌 상대방을 정의하는 것을 멈추고 나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HeForShe 운동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HeForShe 운동은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남성들이 딸, 자매, 그리고 엄마를, 그들의 아들을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했으면 합니다. 소년들 역시 사람이며 상처 받기 쉬운 존재라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게 만들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남성들은 더 진실해지고, 완성된 자아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마 당신은 지금 ‘저 해리포터에 나오던 여자애가 뭘 원하길래 지금 UN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저도 항상 제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보아 왔던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말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에드문트 버크라는 정치인은 악마의 힘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연설에 대해 긴장감과 의심을 느낄 때마다 저는 제 자신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만약 당신에게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비슷한 의심이 들 때, 저는 이 말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75년에서 100년이 되는 시간이 지나야 여성이 동일 노동을 한 남성과 같은 임금을 받을 것입니다. 1550만 명의 소녀들이 조혼을 하지 않게 되는 데 16년이 걸릴 것입니다. 아프리카 시골에 사는 소녀들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은 2086년 이후가 될 것입니다.
인간이 평등해야 한다 생각한다면, 당신은 제가 앞서 말한 ‘무의식적인 페미니스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단어를 찾느라 고생하지만, 우리는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움직임이 바로 HeForShe입니다. 저는 당신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