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2017. 11. 7. 11:25

'한샘'이라는 기업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으로 온라인이 시끌시끌하다. 많은 사람들이 '한샘'을 욕하고 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큰 회의를 느낀다.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 되었을 때, 앞으로의 인생에 정말로 답이 없는 사람들은 피해자에게서 사건의 원인을 찾고, 그나마 상식적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가해자가 '개새끼'라며 가해자를 욕한다. 분노에 차 가해자를 욕하는 사람 중엔 남성도 많다. 그런데 나는 '한샘'이라는 기업에 분노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불편하다.


'한샘' 성폭력 사건이 처음으로 공론화 되었던 네이트 판 게시글의 댓글에서 "원래 사무직은 성희롱이 심하다"는 식의 말을 보았다. 뭔 개소린가 싶지만 이건 사실이다. 다만, 성희롱이 심한 건 사무직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 사회에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여성혐오가 심하기 때문에 사무직 여직원들에게 성폭력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폭력 문제는 '한샘'이 원인이 아니라 '강간 문화' 가 원인이다. 가해자는 '개새끼' 도, '사이코패스'도, '괴물'도 아닌 그저 '평범한' 한국 남성(줄여서 쓰면 큰일남) 이다. 다른 기업도 쉬쉬할 뿐 직장내 성폭력이 빈번할 것이고 '한샘'에 취직하지 않는다고 성희롱을 당하지 않는 게 아니다.


'한샘'이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며 욕하는 남자들을 보며 나는 궁금해진다. 그 남자들 중 강간 문화를 조장하는 데 일조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학창 시절에 여학생에게 성희롱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남학생이 성희롱적 발언을 하는 걸 보며 방관하지 않고 문제 제기를 했던 사람이 있을까? 남톡방에서, 술자리에서 다른 여자들을 안주삼아 성적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던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리벤지 포르노라 불리는 디지털 성범죄를 시청하지 않아본 사람이 있을까? 저렇게 분노하는 사람들 중에 '한샘'을 욕할 자격이 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애꿎은 사람을 모욕하는 것보다는 '한샘'을 '개새끼'라며 욕하는 현상이 좀 더 바람직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성폭력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한샘'도, '가해자'도 아닌 '강간 문화' 이다. 나는 자신들도 성폭력 가해자와 별 다를 거 없는 인간이면서 스스로의 선량함을 전시하기 위해 성폭력 가해자를 욕하는 걸 보고 있는 게 불쾌하다. 죄 없는 사람만 돌을 던졌으면 좋겠다. 자기들 주제도 모르고 돌을 던지는 건 참 꼴보기 싫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자옷과 나  (0) 2018.06.13
체벌 거부 선언문  (0) 2018.04.27
생리대에 대한 단상  (0) 2017.09.16
사투리, 써야 할까, 말아야 할까?  (0) 2017.06.26
참을 수 없는 페미니스트의 가벼움  (0) 2017.06.22
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17. 9. 16. 20:16

릴리안 생리대에서 휘발성유기화합물이 검출된 것 때문에 온라인도, 오프라인도 시끌시끌하다. 몰랐는데 주변에 릴리안 생리대를 쓰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생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터부시되기 때문에 누가 무슨 생리대를 쓰고 있는지 알 기회가 없다가, 이번 일로 생리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게 되었다.


릴리안 생리대를 쓰는 사람이 많았던 건, 릴리안 생리대가 비교적 저렴한 생리대였고 할인, 증정 행사를 많이 했기 때문도 있었겠지만 '순수한 면' 이라는 브랜드명이 소비자들에게 '안전함'과 '깨끗함' 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몸이 가장 민감할 시기에 내 몸에 직접적으로 닿아야 하는 제품이니 합성 화학물질이 들어간 생리대보는 순면을 쓰는 게 더 좋을 테니까. "내 몸을 위한 100% 순면커버"라고 하니까.


최근 발표된 여성환경연대와 김만구 교수의 실험 결과를 보면서, 많은 여성들은 도대체 어떤 생리대를 써야 하는 것일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의 생리대에서 독성물질이 발견되었다고 하고, 시험을 하지 않은 생리대도 안전함을 담보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생리를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나는 플레이텍스 탐폰을 약 1년간 쓰다가 몇 개월 전 생리컵에 완벽히 적응을 해서, 이런 걱정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화가 났다. 체온과 같은 온도의 항온 챔버에 생리대를 넣고 방치해서 휘발성유기화합물 농도를 측정하는 기본적인 실험 없이 생리대가 시판될 수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났고, 그런 생리대를 내가 몇 년간 써왔던 것에 화가 났다. 심지어, 나는 좋은 품질의 생리대를 저렴하게 구입하는 현명한 소비자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스무 살 때 생리량이 줄어들었음을 인지했던 것 같다. 중고등학생 땐 생리대를 하면 피가 새서 바지에 묻고, 오버나이트를 해도 피가 새서 이불에 묻고 그랬으니까. 일회용 생리대를 쓰면 피부가 짓물러서 이런 저런 생리대를 바꿔가며 써보다가 정착한 게 순수한 면 생리대였다. 생리대외의 선택지는 없었고. 그렇게 지속적으로 순수한 면 생리대를 쓰다가 어느 순간부터 중형 생리대를 하고 침대에 누워도 괜찮을 정도로 생리량이 줄었다. 나이를 먹으면 자궁 내벽의 두께가 줄어들어 생리량도 줄어든다길래 그런 건줄 알았다. 그렇지만 생리대를 탈수해서 생리량을 측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런 피해를 어떻게 공론화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생리대 피해사실이 과거엔 없다가 릴리안 보도 이후로 늘어났단 식으로 비꼬는 뉴스(생리대 부작용 신고 보름새 74건…위해성 논란 전에는 '0건')를 봤는데, 사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생리는 여성의 일, 그래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로 과소평가 되고, 부끄럽고 감춰야 할 일이라 많은 여성이 신체적 변화를 겪었어도 그 경험은 공론장에서 나눠지지 않는다. '다른 여성도 똑같이 겪는 피해 사실'이 아니라 '내 몸이 조금 이상한 것'이 된다. 게다가 '위생용품' 이라고 불리는 생리대에 독성 물질이 포함되어 있고 기본적인 시험도 없이 시판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많은 여성이 이번 일을 계기로 일회용 생리대 사용을 멈추고 직구한 탐폰 또는 생리컵을 사용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독성 물질도 독성 물질이지만 생리혈이 체외로 배출되지 않으면 정말 편하고 좋으니까. 그렇지만 질에 무언가를 삽입하는 일은 여전히 한국 여성들에게 "무서운 일" 이다. 슬프다.

Posted by 퍼포린
에세이/책이야기2017. 6. 27. 02:00

<82년생 김지영>


세간의 화제(?)인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읽고 울었다는 후기들을 많이 봐서 나도 눈물줄줄 할까봐 자기 전 침대 위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읽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 그저 화가 났다. 김지영 씨의 삶이 내가 살아온 삶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김지영 씨가 만난 여자들 중엔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쩌면 나의 삶보다 더 진보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지영 씨보다 열 댓 살은 어린데 말이다.


이내 막막해졌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이 김지영 씨의 삶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듯, 앞으로의 삶도 김지영 씨의 삶과 다르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지영 씨가 김지영 씨의 어머니와 별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듯, 김지영 씨의 딸도 김지영 씨와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에서, 시대속에서 애써 진보를 찾아보게 된다. 어려서부터 돈을 벌어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어야 했던 김지영 씨의 어머니와는 다르게 김지영 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 뿐이다. 세대가 교체된 것에 비해 너무 작은 변화이지 않은가.


답답하고 부당하고 나를 분노케 했던 김지영 씨의 연대기를 들은 사람들도 그 부조리를 인지하나, 본인이 부조리에 가담하고 있으며 그것에 맞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이 현실이다. 세상은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여성은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이 해방되지 않으면 개인의 해방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으로 지정된 사람들은 모두 삶의 어느 순간에 부조리를 깨닫고 좌절하는 순간을 겪게 될 것이다. 

'에세이 >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쁜 여자 전성시대>  (0) 2017.08.11
<한국이 싫어서>  (0) 2017.06.16
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17. 6. 22. 18:18

“나는 페미니스트” 선언하면서


불평등한 사회구조 바꾸는 일에


관심두지 않는다면 미사여구일뿐



<참을 수 없는 '페미니스트'의 가벼움> 이라는 칼럼을 보고 많은 비판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이 글에 많은 위로를 받은 사람으로서 나의 생각을 풀어보고자 한다.


엠마 왓슨이 UN에서 "성평등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은 페미니스트이며, 꼭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말하는 연설을 들으며 나는 여러모로 동의했었다. 사정이 있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하더라도 성평등을 지향한다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하기에 충분하단 생각을 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려운) 페미니즘 도서를 많이 읽지 않아도, 집회에 나가지 않아도, 주변의 여성혐오적인 지인과 말싸움을 해서 시원하게 이기지 못해도, 지금 뼈를 깎는 다이어트를 하고 있더라도 선봉에서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심정적 지지를 보낸다면 나의 동지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본인의 실천이 충분치 않다 생각해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칭하는 걸 주저하지 않기를 바랐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허구적인 것이니까.



그런데 어디 가서 이런 말을 쉽사리 하고 다니진 못하겠다. 지금의 한국은 페미니즘 리부트를 맞았고 많은 사람들이 각성을 하고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는데, 인터넷 세계를 일상적으로 들락거리다 보면 이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맞긴 한가 싶은 글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 영페미 세대에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후에 페미니즘적인 말을 하는 게 유행이었다면, 요즘은 "나도 페미니스트지만..." 뒤에 반-페미니즘적인 말이 뒤따라온다.


"나는 페미니스트지만, 한남한남거리면 안된다고 생각해."

"나는 페미니스트인데,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주장하는거야.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는 메갈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나는 페미니스트인데 메갈과 같이 묶이기 싫어. 걔넨 잘못된 페미니스트잖아. 메갈이 페미니즘을 퇴보시켰어."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여성들이 피해받는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성혐오자라 생각해."

"페미니즘은 옳은데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을 잘못 배운 애들이 트위터같은 곳에서 여성우월주의적인 말들을 하더라."


놀랍게도 이 모든 말들은 최근에 내가 한 여초커뮤니티에서 읽은 글과 댓글들의 내용이다. (절 오프라인에서 만나신다면 캡쳐본을 보여드릴 수 있답니다.) 여성일 가능성이 높은,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혹은 페미니즘을 지향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들을 한다. 최근에 여혐별곡 대나무숲에도 비슷한 뉘앙스의 아무말이 올라왔었다. 댓글에서 많은 분들이 한남충이라 욕했지만 글쎄, 나는 그 사람이 여성이거나 심지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말과 안티-페미니스트들의 말은 그닥 다르지 않다. n명의 사람이 있으면 n개의 페미니즘이 있다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페미니스트가 맞을까?



이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 좀 더 페미니즘을 많이 접하고, 공부를 많이 한다면 과격한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던 내가 과격하단 소리를 듣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듯이 그들의 생각도 바뀔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과격함'에 주관적인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게 가능하다. 문제는 이 불쾌함이 실천이 되어 안티-페미니즘의 논리를 답습하였으나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고, 페미니스트 진영에 들어가 기계적 평등을 강요하며 페미니즘의 물결을 막아버리는 사람들이다. 아마 이 '문제'들이 진화하면 에쿼티 페미니스트가 되어 한남들이 원하는 '진정한 페미니스트'의 모델이 되어 줄 것이다.



나는 '진정한/올바른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스트로 불려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내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어쩌면 또다른 의미의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규정하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고민이 들던 차에 여성신문에 실린 이현재 교수의 칼럼을 읽었고, 이것은 나에게 많은 공감과 위로가 되었다.




사족 1. 여성신문 사이트에 이 칼럼이 저격하는 대상은 한국여성민우회, 워마드, 페미당당, 전국디바협회라는 댓글이 달렸다...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렇게 전유되어버릴 때가 많다. 자주 있는 일이라 화낼 필요까진 없고 그냥 비웃고 지나가면 될 것 같다.


사족 2.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위에서 예시로 든 것과 같은 빻은 글이 올라오면 반박하는 댓글이 많이는 아니지만 달리긴 달리고, 그 반박글엔 좋아요가 꽤 눌린단 것이다. 아마 남초였으면 "너 메갈이니?" 하는 댓글들이 달렸을 것이다.

Posted by 퍼포린
에세이/책이야기2017. 6. 16. 20:51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 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7장 중 1장을 읽었으니 읽기 시작했다고 해야하나.

1장까지 읽고 나는 감탄했다. 소설이 시작되자마자 화자는 생리를 시작하는데, 그 부분을 어떠한 판타지적 포장 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사실 남성 소설가의 글을 읽어보면 여성을 표현하는 부분에서 실제 여성이 아니라 본인의 환상 속 여성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국이 싫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소설을 읽기 전 작가의 사진을 먼저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여성 작가가 썼을 거라 짐작했을 것 같다. 


"입국 심사대 앞에 서 있을 때 생리가 터졌어. 줄 선 시간이 아까워서 화장실에 갈까 말까 조금 망설였는데, 사실 망설일 상황이 아니었어. 생굴 같은 게 막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었어. 화장실에 가서 봤더니 팬티에 이미 피가 꽤 묻어 있는 거 있지. 가방에 생리대가 하나 있기는 했는데 여벌 속옷은 당연히 없었지. 화장실에 있는 휴지로 최대한 피를 닦아내고 팬티에 생리대를 붙였어. 달리 방도가 없잖아."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 12쪽

이 부분에서 나는 김훈 작가의 <언니의 폐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불가피했다,...

그래 이게 여성이지. 이게 생리지.
아직 1장밖에 안 읽어봤지만 남은 부분들도 너무 기대된다.


'에세이 >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쁜 여자 전성시대>  (0) 2017.08.11
<82년생 김지영>  (0) 2017.06.27
Posted by 퍼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