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2019. 12. 7. 22:26

머리를 자를 때 생겼던 일

 

머리를 짧게 잘랐다. 머리를 잘라본 경험은 많지만, 이렇게까지 피곤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머리를 자르러 가기 전, 나는 근처에 있는 미용실 중 남성 커트비와 여성 커트비가 같은 곳을 찾아보았다. 여성 커트비가 이유 없이 더 높다는 기사에 달렸던, 자기는 그런 곳 본 적 없단 댓글이 무색하게도,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수많은 미용실 중 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여성 커트비가 3천원에서 5천원정도 높았다. 어쨌든 나는 두 군데 중 더 비싸고 후기도 좋은 곳으로 갔다. 비싸지만 돈을 더 받아도 거기서 머리를 자를 것이라는 후기가 여러 개 있어서 마음이 홀랑 넘어갔었다.

 

여남 커트비가 같은 곳이라면 왠지 미용사도 젠더 감수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왜 그런 쓸데없는 노력을 했는가.. 긴 생머리에 C컬을 넣는 게 더 좋겠다고 하는 미용사의 말에 나는 숏컷을 할 것이라 했고, 미용사는 "남자친구가 허락해 줬어요?" 라고 물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싸우고 싶진 않았다. 싸웠다가 미용사가 내 머리를 이상하게 잘라놓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래서 "허락이 필요한 문제는 아니니까요^^" 라고 대답했다. 돌이켜봐도 잘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네/아니오를 묻는 질문에 제 3의 선택지로 답하는 것이 굉장히 페미니스트다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치만 "남자들은 보통 머리 긴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라는 말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가요 하하.. 라고 했는데 뭐라고 답을 하는게 좋았을까 싶다. 저는 짧은 머리가 좋은걸요. 정도로 이야기할걸 그랬나. 왜 숏컷을 하기로 했냐고도 물어봐서, 새벽에 출근하니 머리 감고 말리는 시간이 길어서라고 대답했다.

 

미용사분은 빻은 이야기를 좀 하긴 했지만, 앞머리를 만들지 말지 모르겠다는 나의 말에 "제가 알아서 해드릴게요." 라고 했을 땐 신뢰도가 확 올라갔다. 그 말을 하고 나서부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는데, 행여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나는 말을 걸지 않았고, 그분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머리를 다 잘라갈 때 미용사는 나에게 염색이나 펌은 안하시냐고 했다. 나는 일 끝나고 와서 운동하고 씻고 나면 잘 시간인데 염색이나 펌은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아보니 나의 검은 머리가 가장 잘 어울리니까 염색하지 말라고 했다고도 말했다. 이어진 미용사의 말이 충격이었는데, "염색을 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안그래도 숏컷해서 무서운데 검은 머리면 더 무서워요." 난 그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어쨌든 커트가 끝이나고 결제를 하고 미용실을 나섰다.

 

다음에 또 오라며 명함을 주셨지만 그 미용실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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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18. 8. 28. 23:32

다이어트를 그만둔 이유


작년 9월쯤이었던가. 나는 맥도날드에서 빅맥 세트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감자튀김이 맛이 없었다. 그때 난 다이어트를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먹는 걸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릴 때부터 단 한 번도 날씬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 2차 성징을 겪으며 보통 체형 정도가 되긴 했지만, 그때도 나는 스스로가 살쪘다 생각했었고, 그 잠깐의 뚱뚱하지 않았던 순간조차도 고입 대비와 끊임없는 야식 때문에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그렇지만 맘 편히 먹는 것은 어려웠다. 가족과 식사를 할 땐 엄마가 그만 먹으라 하고 오빠새끼가 뚱뚱하다 놀린대도 마음 편히 먹었지만, 급식을 먹을 땐 다른 친구들에 비해 많이 먹는 게, 내가 뚱뚱한 원인을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것 같아서 애써 식욕을 참고 먹을 것을 남기곤 했다. 아무래도 급식은 식판에 1인분 정량을 배식받으니 먹는 양이 정확히 비교되어 괜히 마음이 더 불편했던 것 같다.


몸을 망치는 다이어트 이후 나는 헬스장에서 퍼스널 트레이닝(PT)을 받았다. 그때 트레이너에게 식단 조절 방법을 배웠다. 다이어트식은 탄수화물(밥, 고구마 등)+단백질(고기, 두부, 생선, 달걀)+야채 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PT를 받으며 나는 내가 먹는 모든 것을 사진 찍어 그때그때 트레이너에게 카톡으로 보내야 했다. 2개월 뒤, 나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게 되어 잠시 다이어트를 쉬었다. 쉬는 기간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했었다.


작년 여름방학 때, 딱히 뾰족한 계기는 없었지만 나는 다시 한번 본격적인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 사 먹는 것 이외의 외식은 일주일에 한 번, 그 외엔 집에서 닭가슴살과 야채, 현미밥을 먹었다. 나는 야채 종류, 특히 토마토, 파프리카 같은 걸 싫어해서 그나마 먹을 만한 야채는 양상추, 양배추, 상추 정도였다. (PT를 받을 당시 트레이너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굳이 토마토 같은 걸 먹을 필요는 없다고 했었다) 거기다 드레싱을 잔뜩 뿌려 먹었다. 그래야 먹을 만하니까. 이 정도도 못 하는 다이어트를 하면서 나 자신을 혹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끼니 시간 즈음 이외엔 배가 고프진 않았다. 굶지 않고 잘 챙겨 먹었으니까. 엄격하지만 혹독하진 않았다. 69kg이 되면 두끼떡볶이에 가서 떡볶이를 잔뜩 먹겠다는 생각을 하며 버텼다. 내 자제력이 얼마나 놀라웠냐면, 작년 8월 한국여성학회 캠프에서 야식으로 피자가 나왔는데도 입도 대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엔 참았던 거였지만 식이조절을 하고, 운동하러 가는 건 점차 습관이 되어갔다.


그렇게 나는 점점 살이 빠졌다. 극적으로 살이 빠지진 않았지만 다이어트 기간이 길어지니 옷 사이즈가 줄어갔다. 나는 닭가슴살의 촉촉함을 느끼고 있었고, 양상추에 뿌리는 드레싱도 점점 양이 적어지고 있었다. 라면 먹는 게 더 이상 좋지 않았고 자주 가던 떡볶이집의 떡볶이가 자극적이라 느껴졌다. 내 체형도, 입맛도 변해갔다.


내가 좋아하는 건 그런거였다. 고기, 기름진 것, 크림, 치즈, 버터, 하얀 음식들...빵과 면, 떡... 다이어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음식들이 나는 좋았다. 다이어트 음식을 먹는 건, 어쩔 수 없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의 부역자인 내가, '뚱뚱해도 괜찮아! 내 몸이 들어가는 옷을 옷가게에서 살 수 없는 건 패션 산업의 잘못이야!' 하고 소리치는 내면의 페미니스트를 달래가며 빻은 사회와 타협하는 과정이었다.


입맛이 변하는 건, 나를 잊어가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먹는게 즐겁지 않았다. 그러다 오랜만에 맥도날드에서 감자튀김을 먹었다. 짜고 맛없었다. 그 때 충격을 받았다. 맥도날드 감자튀김이 너무 좋아서 항상 햄버거 단품이나 콤보가 아닌, 세트 메뉴를 시키던 나였는데. 혼란이 왔다. 타협이고 절제일 뿐이라 생각했던 것이 나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난 다이어트를 관두고 그냥 맛있는 거 먹으면서 나름대로 몸과 마음의 건강을 관리하며 살고 있다. 어쩌면 '69kg 이 되면 두끼떡볶이에 가야지'하고 다짐했던 때가 아득할 정도로, 지금은 객관적으로 뚱뚱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타협' 없이, 망설임 없이 엄격한 다이어트를 그만둘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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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18. 6. 19. 00:18

왜 내 겨털은 햄보칼 수가 엄써!!!!!


효리네 민박을 정주행 하면서, 다소 뻣뻣했던 아이유가 효리 언니를 따라 열심히 요가를 배우고 나니 유연해진 것을 보고 한 뻣뻣 하는 나도 열심히 하면 유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 근처 요가원에 등록했다.


요가를 할 때 따로 정해진 복장은 없지만, 몸을 마구 뒤집어 버리는 동작을 할 때 옷이 말려올라가거나 하면 신경이 쓰여서 동작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몸에 딱 붙는 상의와 하의를 입는 게 좋다고 했다. 나에겐 운동할 때 입는 레깅스는 있지만 작년의 다이어트 때문에 갖고 있던 상의는 모두 헐렁해져서 딱 붙는 상의는 검은색 민소매 셔츠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제모를 안 한 지 좀 시간이 지나서 반 정도 털이 성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의 털들은 색도 진하고 숱도 많고 곱슬거려서 다른 사람들의 털보다 훨씬 존재감이 크다...! 그래서 일단 첫날엔 민소매 티를 입고 위에 헐렁한 반팔 티를 입고 갔다. 가서 눈치를 좀 보고 민소매를 입을지 말지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처음으로 요가 수업을 받은 날, 나는 내가 가진 최대한의 눈치를 발휘해서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요가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대부분 반팔을 입고 있었다. 민소매를 입은 사람은 딱 한 명 있었고, 그 사람의 겨드랑이는 정말 털 하나 없이 깨끗했다. 자신이 없어져 버렸다.


그날 밤, 집에 와서 또 한번 고민했다. 밤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모를 하고 내일 민소매를 입을까? 그치만 지금까지 털을 기른 게 아깝다.

그래도 털을 마구 달아놓은 채로 팔을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요가 동작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러면 제모를 하지 말고 겨털이 잘 안 보이게 탈색을 할까? 하지만 그러면 같은 숱의 겨털이라도 덜 풍성해 보이지 않을 것 같고 그건 왠지 자존심이 좀 상하는데..

그냥 깨끗하게 제모를 할까? 하다가, 왁스 스트립으로 겨털을 뽑아낼 때의 고통이 상기되었다. 왁싱할 때 핏방울이 맺히는 건 예사인데. (면도기로 겨털을 밀면 깨끗하게 제모가 되지도 않을 뿐더러 다시 날 때 따갑다. 나는 예전에 잦은 면도로 피부가 상해서 피부과에 간 적도 있었다.) 나는 아픈 걸 잘 참지만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니까. 아, 참으로 어렵다.


왜 내 겨털은 햄보칼수가업서!!!



왜 나는 자신있게 제모를 끊을 수 없을까. 심지어 요가 수업은 다들 자기 운동 하느라 힘들어서 남 신경쓸 시간도 없고, 같이 수업 듣는 사람들은 전부 여성이었는데. 그래서 다들 여자의 겨드랑이에 털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자연스럽다는 걸 알고 있을텐데. 제모를 안 해도 되는 천혜의 환경 아닌가. 그런데도 제모 없이는 민소매를 못 입는 내가 미웠다. 내 겨드랑이도 날 미워하겠지.




밤새 고민 후 다음날 나는 요가원에 반팔티를 입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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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18. 6. 13. 00:57

남자옷과 나


작년 추석 연휴 때였던가. 무시무시한 겨울 추위를 미리미리 대비하기 위해 나는 롯데 아울렛에 패딩을 사러 갔다. 디자인이고 뭐고 경기도의 강력한 추위를 버티게 해 줄 가볍고 따뜻한 옷을 사는 것을 목표로, 이런 저런 브랜드 매장을 지칠 때까지 돌아다녔다. 가격까지 저렴하면 금상첨화고.


여러 매장을 돌고 나서 나의 선택지를 이리저리 고민하고 비교하다가 노스페이스 매장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문 앞에 진열되어 있는 파란색 패딩을 발견했다!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으면서(후기) 태어나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샛파랑색이 나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는 것에 감탄한 나는 주저없이 그 옷을 입어보았다. 한겨울에 패딩 안에 두꺼운 옷을 겹쳐 입어도 넉넉하도록, 평소 입는 것보다 두 사이즈 큰 옷으로. 파란 패딩을 입은 거울 속의 나는 굉장히 귀여웠고 따뜻해(더워)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패딩은 그 전까지 봤던, 살지 말지 고민하던 패딩의 1/3 가격이었고 새 옷을 사는 나도, 결제하는 엄마도 흡족하게 그 패딩을 사들고 매장을 나왔다. 매장 밖에서 엄마가 말했다.

"너 이제 남자 옷도 과감하게 입네"


그랬다. 주로 인터넷에서 옷을 사입기 전, 그러니까 웬만하면 엄마 손을 잡고 오프라인 매장에서 옷을 사던 고등학생 때까지의 나는, 뚱뚱했어서 여성용으로 나온 옷은 제일 큰 사이즈조차 작았다. 그래서 인터넷의 빅사이즈 의류 쇼핑몰에서 구매한 옷이 아니면 여성용으로 나온 옷 말고, 더 큰 사이즈가 있는 남성용 옷을 입어야 했다. 그게 나의 뚱뚱함으로 인한 것이니까 너무 수치스러웠다. 옷가게에서 "손님 사이즈는 없어요."라거나 "남성 사이즈로 보셔야겠는데."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비참해졌었다. 여성성이 박탈된 것이라 느껴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티셔츠 같은 건 남자 옷과 여자옷이 차이가 별로 안난다지만 바지 지퍼와 셔츠 단추 방향이 다른 게 나는 너무도 신경쓰였다. 나는 평범한 여자애였어서 큰 사이즈 옷이 제작되지 않는 게 문제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타박했었다.


보통의 한국 여성들이 전혀 뚱뚱하지 않은데도 자신은 너무 살쪄서 다이어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나는 정말로 객관적으로 뚱뚱했다. BMI 지수가 중도비만과 고도비만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왔다갔다했으니까. 그랬던 내가 작년 여름의 엄격한 (혹독하진 않은) 다이어트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정상체중 범위에 진입하고, 66사이즈 여성복을 무리없이 입을 수 있게 되면서 나는 더 이상 남자 옷을 입는 것이 수치스럽지 않았다. 그 당시 SNS에서는 남성용 옷이 같은 가격이라도 훨씬 질과 기능성이 좋단 말이 많이들 오갔었지만 그래도 내가 살찐 상태였다면 남성용 옷을 당당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남자 옷을 입어도 수치스럽지 않았던 건 그것이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라는 건, 여러 가지 가능한 선택지 중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놓고 실제로는 억압이나 어떠한 상황 때문에 제한된 선택지로 밀려나는 건 자유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남자 옷을 입는 건 정말로 자유로운 선택이었다. 뚱뚱해서 어쩔 수 없이 여성의 사이즈에서 밀려나 남자 옷을 입어야만 했던 게 아니라, 나는 여자 옷도 남자 옷도 입을 수 이는데 그저 디자인, 기능, 가격이 맘에 들기 때문에 남자 옷을 선택한 거였으니까.


다이어트는 그런 점에서 정말 아이러니한 것이었다. 나는 다이어트를 해서 옷 사이즈를, 여성복과 남성복 중 어떤 것을 선택할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다이어트를 위해서는 나의 자유를 많이 포기해야 했다. 맛있는 음식, 자극적인 음식, 빵/떡/면을 먹을 자유를 포기하고, 빈둥거릴 자유를 포기하고, 바쁜 날에도 시간을 쪼개서 운동을 했다. 사실 나는 면요리와 떡볶이를 좋아하고, 정적인 활동을 좋아하고, 시간이 남을 땐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데도.


페미니즘을 접하고, 몸을 옷에 맞추는 게 아니라 옷을 몸에 맞추는 게 맞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 의류회사들이 정신을 차려 큰 사이즈 옷을 판매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예쁜옷, 여성용으로 나온 옷을 맘 놓고 입고 싶었다. 방학이 지나 복학을 하고, 졸업하고 취직을 하게 되면 더 이상 엄격한 다이어트를 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이어트 시장의 소비자가 되기로 결정했었다. 분명 미의 이데올로기에 부역하는 것이자 스스로에 대한 억압이었다. 나의 다이어트는, 여성에게 다이어트를 강요하는 사회와 타협하려고 스스로의 욕망을 참아내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나는 자유를 포기해서 자유를 얻었다.  내가 얻은 자유가 '진짜' 자유일까? 여기까지 글을 쓰면서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다.

Posted by 퍼포린
후기2018. 5. 14. 01:39

*이전 글

<피의 연대기> 후기-①/영화의 주요 내용과는 상관없을 것 같은 단상들

<피의 연대기> 후기-②/생리대는 휴지와 같다


<피의 연대기> 후기-③/생리와 자본주의


<피의 연대기>를 보며, 너무 분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던 부분이 있었다. 저소득층 여학생들이 생리대 살 돈이 없어 깔창을 생리대로 쓰거나, 생리 기간이 되면 수건을 깔고 누워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내용이 다큐멘터리에 나왔다. 2016년에 여러 번 보도되었고,(기사) 이후 여러 복지 정책이 시행되고 기부 및 펀딩이 있었지만 여전히 생리대는 누군가에겐 비싸다. 나의 생리 경험과 영화를 곱씹어보면 돈이 없을수록 생리에 더 큰 돈을 들이거나, 더 불편해야만 하는 모순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생리대를 직접 사본 건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그 전까지는 엄마와 함께 마트에 가서 생리대를 샀었으니까. 당시엔 소셜커머스에서 한 학기 정도 쓸 분량의 생리대를 한 번에 사서 썼었다. 그게 단가로 따졌을 때 가장 저렴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래서 생리대 가격 인하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소셜커머스에서 사면, 생리대를 싸게 살 수 있는데 왜 생리대 가격을 인하해야 하는 걸까? 하고 엄마한테 물었을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너 고등학생 때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니?"

그랬다. 소셜커머스에서 대량으로 생리대를 구매해 비용을 아낄 수 있었던 건, 대학생이 되어서 시간 여유가 늘었기 때문에 최저가 검색을 할 수 있고, 용돈이 늘어 한 번에 결제할 수 있는 금액이 커져서 가능한 거였다.


2년 전부터 나는 탐폰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국산 탐폰을 썼고, 생리대를 쓰다 탐폰을 쓰니 완전 신세계였다. 냄새도 안나고 살이 짓무르는 일도 없었다. 생리혈이 새서 옷에 묻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생리대보다 좀 더 자주 갈아야 하고, 소셜 커머스에서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없어서 돈이 더 들었다. 몇 달간 한국산 탐폰을 쓰다가 플레이텍스 탐폰이 훨씬 좋단 말에, 탐폰을 직구하기 시작했다. 원래 옛날엔 우리 나라에서도 플레이텍스 탐폰을 살 수 있었지만 몇 년 전에 철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탐폰을 거의 안쓰긴 하니까... 아무튼 아마존에서 플레이텍스 탐폰을 직구하면 아주 싼 가격에 많은 탐폰을 살 수 있었다. 다만 배송비가 비싸니까 많이 시켜야하는 단점이 있고.. 나는 한 번 살 때 5만원 정도를 사서 거의 1년 넘게 썼던 것 같다. 아무튼 플레이텍스 탐폰과 한국 탐폰의 편리함은 정말 천지차이였고 나는 절대로 고통스러운 한국 탐폰을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생리컵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남은 탐폰을 이곳저곳에 나눠줬고, 나는 더이상 생리 때문에 돈을 쓰지 않는다. 나는 골든 컵을 찾기까지 10만원 정도를 소비했다. 보통 생리컵 하나가 4~5만원 가량인 것을 생각하면 두 번째 만에 적응한 것이니 시행착오를 많이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청소년이나 저소득층에게는 부담스러운 돈일 테고, 성인 중에도 해외 직구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생리컵을 이용해서 편리하고 저렴한 생리를 할 수 있는 것 역시 나의 특권이었던 것이다.


10대부터 50대까지, 여성들은 생리를 한다. 생리를 한다는 사실은 평등하지만 여성 개개인은 평등하지 않다. 자본 계급과 정보 접근성에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생리 역시 자본주의적 계급에 따라 계급이 나뉘게 된다. 이런 부조리함이 나는 너무도 분했다.

Posted by 퍼포린
아주짧은글2018. 1. 20. 16:18

백인 미국인은 한국인을 어떻게 볼까?(기사 본문 링크)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고 방식과 행동이 아무 맥락없이 짠 하고 생성되기 보다 많은 부분이 사회의 합의/규범의 안에서 생성된다. 적당한 규범이 성립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눈치 보다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따라한다’가 많은 사람들의 행동 규칙이다. 예컨대 방에서 ‘불’이 나도 혼자인 경우에는 본능을 따라 바로 도망가지만, 여러 사람들이 존재하게 되면 어떻게 할지 서로 눈치부터 본다. 그러다가 결국 혼자일 때보다 대피가 늦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


어떤 경우에라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혹은 모두가 YES 또는 NO 라고 할 때 혼자 반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드물다. 이렇게 행동 규범을 외주하는 인간으로서 차별주의자들 (및 차별에 대해 평소 별 다른 생각이 없던 사람들)의 경우 자신과 같은 차별주의자, 또는 적어도 차별을 방관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메시지는 이제부터는 ‘차별해도 된다’는 허용이다. 이미 가지고 있던 차별과 생각 없음을 꺼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차별을 밖으로 휘두르는 것과 그러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오랜만에 과학 동아 기사를 찾아 읽었다. (아주 좋은 기사였다!)

"행동 규범을 외주하는 인간으로서 차별주의자" 를 아주 한심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스스로 생각이란 걸 못하니 본인이 타자로 존재하는 집단에서 차별을 당함으로써 그들이 강제(타의) 역지사지 해보길 바랐다. 그렇지만 나도 행동 규범을 외주하고 있지 않나. 페미니스트이고 다른 여러 소수자들의 인권 운동에 연대하기로 결정했지만, 그 결정 역시도 인권 감수성을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게 한 주변 환경 덕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그럼 이것은 외주가 아닌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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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17. 9. 16. 20:16

릴리안 생리대에서 휘발성유기화합물이 검출된 것 때문에 온라인도, 오프라인도 시끌시끌하다. 몰랐는데 주변에 릴리안 생리대를 쓰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생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터부시되기 때문에 누가 무슨 생리대를 쓰고 있는지 알 기회가 없다가, 이번 일로 생리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게 되었다.


릴리안 생리대를 쓰는 사람이 많았던 건, 릴리안 생리대가 비교적 저렴한 생리대였고 할인, 증정 행사를 많이 했기 때문도 있었겠지만 '순수한 면' 이라는 브랜드명이 소비자들에게 '안전함'과 '깨끗함' 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몸이 가장 민감할 시기에 내 몸에 직접적으로 닿아야 하는 제품이니 합성 화학물질이 들어간 생리대보는 순면을 쓰는 게 더 좋을 테니까. "내 몸을 위한 100% 순면커버"라고 하니까.


최근 발표된 여성환경연대와 김만구 교수의 실험 결과를 보면서, 많은 여성들은 도대체 어떤 생리대를 써야 하는 것일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의 생리대에서 독성물질이 발견되었다고 하고, 시험을 하지 않은 생리대도 안전함을 담보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생리를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나는 플레이텍스 탐폰을 약 1년간 쓰다가 몇 개월 전 생리컵에 완벽히 적응을 해서, 이런 걱정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화가 났다. 체온과 같은 온도의 항온 챔버에 생리대를 넣고 방치해서 휘발성유기화합물 농도를 측정하는 기본적인 실험 없이 생리대가 시판될 수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났고, 그런 생리대를 내가 몇 년간 써왔던 것에 화가 났다. 심지어, 나는 좋은 품질의 생리대를 저렴하게 구입하는 현명한 소비자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스무 살 때 생리량이 줄어들었음을 인지했던 것 같다. 중고등학생 땐 생리대를 하면 피가 새서 바지에 묻고, 오버나이트를 해도 피가 새서 이불에 묻고 그랬으니까. 일회용 생리대를 쓰면 피부가 짓물러서 이런 저런 생리대를 바꿔가며 써보다가 정착한 게 순수한 면 생리대였다. 생리대외의 선택지는 없었고. 그렇게 지속적으로 순수한 면 생리대를 쓰다가 어느 순간부터 중형 생리대를 하고 침대에 누워도 괜찮을 정도로 생리량이 줄었다. 나이를 먹으면 자궁 내벽의 두께가 줄어들어 생리량도 줄어든다길래 그런 건줄 알았다. 그렇지만 생리대를 탈수해서 생리량을 측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런 피해를 어떻게 공론화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생리대 피해사실이 과거엔 없다가 릴리안 보도 이후로 늘어났단 식으로 비꼬는 뉴스(생리대 부작용 신고 보름새 74건…위해성 논란 전에는 '0건')를 봤는데, 사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생리는 여성의 일, 그래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로 과소평가 되고, 부끄럽고 감춰야 할 일이라 많은 여성이 신체적 변화를 겪었어도 그 경험은 공론장에서 나눠지지 않는다. '다른 여성도 똑같이 겪는 피해 사실'이 아니라 '내 몸이 조금 이상한 것'이 된다. 게다가 '위생용품' 이라고 불리는 생리대에 독성 물질이 포함되어 있고 기본적인 시험도 없이 시판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많은 여성이 이번 일을 계기로 일회용 생리대 사용을 멈추고 직구한 탐폰 또는 생리컵을 사용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독성 물질도 독성 물질이지만 생리혈이 체외로 배출되지 않으면 정말 편하고 좋으니까. 그렇지만 질에 무언가를 삽입하는 일은 여전히 한국 여성들에게 "무서운 일" 이다. 슬프다.

Posted by 퍼포린
에세이/책이야기2017. 8. 11. 02:14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주의가 여성을 해방시키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페미니즘이 자본주의하고 양립할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실제로 파이어스톤은 '페미니즘적 사회주의'를 요구했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급진 페미니즘이 신참 여성들에게 다른 형태의 사회적 지배에 관해서도 정치적으로 교육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윌리스가 지적하듯 급진 페미니즘은 신참자들에게 여성으로서 당하는 억압을 인식하 게 했지만 그 여성들을 자동으로 '전반적 사회 변혁에 헌신하는' 급진주의자로 변신시키지는 못했다. 파이어스톤 같은 여성들은 이 신참 여성들의 일부가 페미니즘을 자기 계발의 이데올로기로 움켜쥐는 모습을 보면서 환멸을 느꼈다.


앨리스 에콜스, 「나쁜 여자 전성시대」 , <4장. 급진 페미니즘의 갈래들 : 레드스타킹스, 셀16, '페미니스트들', 뉴욕급진페미니스트>,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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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에세이/책이야기2017. 6. 27. 02:00

<82년생 김지영>


세간의 화제(?)인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읽고 울었다는 후기들을 많이 봐서 나도 눈물줄줄 할까봐 자기 전 침대 위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읽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 그저 화가 났다. 김지영 씨의 삶이 내가 살아온 삶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김지영 씨가 만난 여자들 중엔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쩌면 나의 삶보다 더 진보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지영 씨보다 열 댓 살은 어린데 말이다.


이내 막막해졌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이 김지영 씨의 삶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듯, 앞으로의 삶도 김지영 씨의 삶과 다르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지영 씨가 김지영 씨의 어머니와 별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듯, 김지영 씨의 딸도 김지영 씨와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에서, 시대속에서 애써 진보를 찾아보게 된다. 어려서부터 돈을 벌어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어야 했던 김지영 씨의 어머니와는 다르게 김지영 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 뿐이다. 세대가 교체된 것에 비해 너무 작은 변화이지 않은가.


답답하고 부당하고 나를 분노케 했던 김지영 씨의 연대기를 들은 사람들도 그 부조리를 인지하나, 본인이 부조리에 가담하고 있으며 그것에 맞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이 현실이다. 세상은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여성은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이 해방되지 않으면 개인의 해방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으로 지정된 사람들은 모두 삶의 어느 순간에 부조리를 깨닫고 좌절하는 순간을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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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2017. 6. 22. 18:18

“나는 페미니스트” 선언하면서


불평등한 사회구조 바꾸는 일에


관심두지 않는다면 미사여구일뿐



<참을 수 없는 '페미니스트'의 가벼움> 이라는 칼럼을 보고 많은 비판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이 글에 많은 위로를 받은 사람으로서 나의 생각을 풀어보고자 한다.


엠마 왓슨이 UN에서 "성평등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은 페미니스트이며, 꼭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말하는 연설을 들으며 나는 여러모로 동의했었다. 사정이 있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하더라도 성평등을 지향한다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하기에 충분하단 생각을 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려운) 페미니즘 도서를 많이 읽지 않아도, 집회에 나가지 않아도, 주변의 여성혐오적인 지인과 말싸움을 해서 시원하게 이기지 못해도, 지금 뼈를 깎는 다이어트를 하고 있더라도 선봉에서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심정적 지지를 보낸다면 나의 동지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본인의 실천이 충분치 않다 생각해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칭하는 걸 주저하지 않기를 바랐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허구적인 것이니까.



그런데 어디 가서 이런 말을 쉽사리 하고 다니진 못하겠다. 지금의 한국은 페미니즘 리부트를 맞았고 많은 사람들이 각성을 하고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는데, 인터넷 세계를 일상적으로 들락거리다 보면 이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맞긴 한가 싶은 글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 영페미 세대에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후에 페미니즘적인 말을 하는 게 유행이었다면, 요즘은 "나도 페미니스트지만..." 뒤에 반-페미니즘적인 말이 뒤따라온다.


"나는 페미니스트지만, 한남한남거리면 안된다고 생각해."

"나는 페미니스트인데,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주장하는거야.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는 메갈은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나는 페미니스트인데 메갈과 같이 묶이기 싫어. 걔넨 잘못된 페미니스트잖아. 메갈이 페미니즘을 퇴보시켰어."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여성들이 피해받는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성혐오자라 생각해."

"페미니즘은 옳은데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을 잘못 배운 애들이 트위터같은 곳에서 여성우월주의적인 말들을 하더라."


놀랍게도 이 모든 말들은 최근에 내가 한 여초커뮤니티에서 읽은 글과 댓글들의 내용이다. (절 오프라인에서 만나신다면 캡쳐본을 보여드릴 수 있답니다.) 여성일 가능성이 높은, 본인이 페미니스트라고, 혹은 페미니즘을 지향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들을 한다. 최근에 여혐별곡 대나무숲에도 비슷한 뉘앙스의 아무말이 올라왔었다. 댓글에서 많은 분들이 한남충이라 욕했지만 글쎄, 나는 그 사람이 여성이거나 심지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말과 안티-페미니스트들의 말은 그닥 다르지 않다. n명의 사람이 있으면 n개의 페미니즘이 있다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페미니스트가 맞을까?



이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 좀 더 페미니즘을 많이 접하고, 공부를 많이 한다면 과격한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던 내가 과격하단 소리를 듣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듯이 그들의 생각도 바뀔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과격함'에 주관적인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게 가능하다. 문제는 이 불쾌함이 실천이 되어 안티-페미니즘의 논리를 답습하였으나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고, 페미니스트 진영에 들어가 기계적 평등을 강요하며 페미니즘의 물결을 막아버리는 사람들이다. 아마 이 '문제'들이 진화하면 에쿼티 페미니스트가 되어 한남들이 원하는 '진정한 페미니스트'의 모델이 되어 줄 것이다.



나는 '진정한/올바른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스트로 불려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내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어쩌면 또다른 의미의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규정하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고민이 들던 차에 여성신문에 실린 이현재 교수의 칼럼을 읽었고, 이것은 나에게 많은 공감과 위로가 되었다.




사족 1. 여성신문 사이트에 이 칼럼이 저격하는 대상은 한국여성민우회, 워마드, 페미당당, 전국디바협회라는 댓글이 달렸다...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렇게 전유되어버릴 때가 많다. 자주 있는 일이라 화낼 필요까진 없고 그냥 비웃고 지나가면 될 것 같다.


사족 2.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위에서 예시로 든 것과 같은 빻은 글이 올라오면 반박하는 댓글이 많이는 아니지만 달리긴 달리고, 그 반박글엔 좋아요가 꽤 눌린단 것이다. 아마 남초였으면 "너 메갈이니?" 하는 댓글들이 달렸을 것이다.

Posted by 퍼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