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2021. 8. 12. 23:09

영화 <문영> 포스터

영화를 다 보고 극장을 나올 때, 왠지 이 영화를 꼭 다시 보게 될 거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2017년 1월 개봉한 <문영>이 내게는 그런 영화였다. 2018년 넷플릭스를 처음 이용하게 되었을 때, 마법같이 <문영>이 메인에 떠있었다. 그렇지만 넷플릭스에 있으니 천천히 봐야겠다며 우물쭈물하던 사이, 넷플릭스에서 <문영>이 사라졌다ㅠㅠ

그렇게 2021년이 되어서야 <문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이런 가족 영화(족가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 가족은 화목하다는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사회에서, 현실 세계 어딘가에 숨어있는 불행을 조명하는 것은, 행복한 이들의 판타지를 깨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공감을 통한 위로를 준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선택하지 않은 혈연을 떠나 내가 선택한 인연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의 편견을 깨면서 말이다.

사족 : 김태리의 연기는 정말 놀랍다. 이 영화의 강렬함은 마지막 장면의 김태리로부터 오는 것이다.

 

Posted by 퍼포린
후기2018. 5. 14.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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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연대기> 후기-①/영화의 주요 내용과는 상관없을 것 같은 단상들

<피의 연대기> 후기-②/생리대는 휴지와 같다


<피의 연대기> 후기-③/생리와 자본주의


<피의 연대기>를 보며, 너무 분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던 부분이 있었다. 저소득층 여학생들이 생리대 살 돈이 없어 깔창을 생리대로 쓰거나, 생리 기간이 되면 수건을 깔고 누워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내용이 다큐멘터리에 나왔다. 2016년에 여러 번 보도되었고,(기사) 이후 여러 복지 정책이 시행되고 기부 및 펀딩이 있었지만 여전히 생리대는 누군가에겐 비싸다. 나의 생리 경험과 영화를 곱씹어보면 돈이 없을수록 생리에 더 큰 돈을 들이거나, 더 불편해야만 하는 모순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생리대를 직접 사본 건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그 전까지는 엄마와 함께 마트에 가서 생리대를 샀었으니까. 당시엔 소셜커머스에서 한 학기 정도 쓸 분량의 생리대를 한 번에 사서 썼었다. 그게 단가로 따졌을 때 가장 저렴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래서 생리대 가격 인하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소셜커머스에서 사면, 생리대를 싸게 살 수 있는데 왜 생리대 가격을 인하해야 하는 걸까? 하고 엄마한테 물었을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너 고등학생 때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니?"

그랬다. 소셜커머스에서 대량으로 생리대를 구매해 비용을 아낄 수 있었던 건, 대학생이 되어서 시간 여유가 늘었기 때문에 최저가 검색을 할 수 있고, 용돈이 늘어 한 번에 결제할 수 있는 금액이 커져서 가능한 거였다.


2년 전부터 나는 탐폰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국산 탐폰을 썼고, 생리대를 쓰다 탐폰을 쓰니 완전 신세계였다. 냄새도 안나고 살이 짓무르는 일도 없었다. 생리혈이 새서 옷에 묻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생리대보다 좀 더 자주 갈아야 하고, 소셜 커머스에서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없어서 돈이 더 들었다. 몇 달간 한국산 탐폰을 쓰다가 플레이텍스 탐폰이 훨씬 좋단 말에, 탐폰을 직구하기 시작했다. 원래 옛날엔 우리 나라에서도 플레이텍스 탐폰을 살 수 있었지만 몇 년 전에 철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탐폰을 거의 안쓰긴 하니까... 아무튼 아마존에서 플레이텍스 탐폰을 직구하면 아주 싼 가격에 많은 탐폰을 살 수 있었다. 다만 배송비가 비싸니까 많이 시켜야하는 단점이 있고.. 나는 한 번 살 때 5만원 정도를 사서 거의 1년 넘게 썼던 것 같다. 아무튼 플레이텍스 탐폰과 한국 탐폰의 편리함은 정말 천지차이였고 나는 절대로 고통스러운 한국 탐폰을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생리컵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남은 탐폰을 이곳저곳에 나눠줬고, 나는 더이상 생리 때문에 돈을 쓰지 않는다. 나는 골든 컵을 찾기까지 10만원 정도를 소비했다. 보통 생리컵 하나가 4~5만원 가량인 것을 생각하면 두 번째 만에 적응한 것이니 시행착오를 많이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청소년이나 저소득층에게는 부담스러운 돈일 테고, 성인 중에도 해외 직구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생리컵을 이용해서 편리하고 저렴한 생리를 할 수 있는 것 역시 나의 특권이었던 것이다.


10대부터 50대까지, 여성들은 생리를 한다. 생리를 한다는 사실은 평등하지만 여성 개개인은 평등하지 않다. 자본 계급과 정보 접근성에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생리 역시 자본주의적 계급에 따라 계급이 나뉘게 된다. 이런 부조리함이 나는 너무도 분했다.

Posted by 퍼포린
후기2018. 4. 25.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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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연대기> 후기-①/영화의 주요 내용과는 상관없을 것 같은 단상들


<피의 연대기> 후기-②/생리대는 휴지와 같다


영화 <피의 연대기>에서 얻게 된 가장 큰 교훈(?)은 "생리대는 휴지와도 같다." 는 것이었다.

사실 영화를 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ㅠㅠ)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공공화장실에 생리대를 모두 배치하는 정책을 시행했다고 한다. 생리는 말 그대로 '생리 현상' 이니까 인간이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생리대는 휴지와 같은 용도인 것이다.

14살에 초경을 한 뒤로 거의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대학원을 다닌다면 정말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을 기간 동안 생리를 하면서도, 생리대는 생필품이고 면세품목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생리대가 휴지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었다.

웬만큼 괜찮은 외부의 화장실에 가면 휴지가 비치되어 있다. 가정에서는 취향에 따라 휴지를 선택해서 구입해서 써야 하고, 학교나 회사 화장실 휴지가 맘에 안들면 개인 휴지를 휴대해 다니며 써도 되는 것이다. 생리대도 그래야 한다. 오히려 휴지보다 더 다급하게 필요해질 수 있는 게 생리대이다. 대·소변은 잠시 동안은 참을 수 있지만 생리는 참았다가 배출하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생리대와 휴지를 똑같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피의 연대기>를 보며 얻은 가장 큰 인식의 전환인데, 센세이션을 글로 풀어내려 하니 어렵다. 요약하자면 생리대는 휴지와 같아서 공공 화장실에는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생리대가 비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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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연대기> 후기-③/생리와 자본주의


Posted by 퍼포린
후기2018. 4. 5. 22:12

<피의 연대기> 후기-①/영화의 주요 내용과는 상관없을 것 같은 단상들


이 영화는 지난 1월 18일에 개봉한 영화이다. 16년인가 17년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것 같다는 기억이 있는데 그때 인기를 끌어서인지 이번에 정식으로 개봉하게 되었다. 그것도 상상마당 배급으로! 덕분에 영화가 개봉한지 몇 주 지난 2월 9일에 마침내 나는 <피의 연대기>를 보았다. 그러고 후기는 4월 초에 쓰고 있다... ㅎ 그치만 상상마당 배급이라 그런지 아직도 서울의 일부 영화관에서 상영중이다!! (네이버 영화정보) 많이 많이 보세요 여러분..


-영상미-

여타 독립영화와는 다르게, 피의 연대기는 고화질의 영상, 비비드한 색감을 만들어내어서 영화를 보며 상쾌함을 느꼈었다. 인터뷰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배경으로 책이 가득한 책장이 나온다거나 해서 인터뷰이에 시선 집중이 안될 가능성이 있다면 배경을 자연스레 페이드 아웃한 것도 좋았다. 상쾌한 미감이 아니었더라도 재밌게 관람했을 영화였지만 영상미 덕에 더 기분좋게 영화 관람을 했었다.

영화 중간 부분에서 생리의 역사를 설명할 때 손으로 그린 애니메이션이 나왔다. 여성의 몸을, '전형적이지 않지만 실제적으로' 그려낸 것이 좋았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그림 작가의 느낌이 났는데, 크레딧에는 애니메이터 이름이 실명으로 나와서 그 작가분이 영화에 참여하신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자막에서 성(姓)을 빼다-

이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인물 이름 자막, 그리고 엔딩 크레딧에는 성을 제외한 이름만 표시가 되어 있다. 깨알같은 부분이지만 가부장제의 산물인 성씨를 빼버린 것이 영화를 제작하는데 반영된 페미니즘적 가치관임이 느껴져서 좋았다.


-빅이슈-
상상마당에서 영화를 보고 홍익대학교 앞(홍대 앞 아님ㅋㅋ)으로 갔는데 빅이슈 판매원이 계셨다. 인스타그램 우주스타인 히끄고양이가 표지모델로 나오는 빅이슈 171호를 옛날부터 사고 싶었다. 빅이슈를 사들고 근처 카페에서 펼쳐봤는데, <피의 연대기>의 김보람 감독님 인터뷰가 실려있었다! 고양이와 김보람 감독님이 함께 실린 단돈 5천원의 잡지라니 정말로 데박데박이 아닐 수가 없다. 요즘 바빠서 아직 못 읽어봤지만... 일단 잡지를 사뒀으니 5월 쯤엔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정말로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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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연대기> 후기-③/생리와 자본주의

Posted by 퍼포린
후기2018. 1. 27. 01:04

영화 <1987>을 보면서 많은 감정들과 생각이 지나쳐 갔고, 그래서 꼭 후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벌써 영화 본지 2주가 지났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ㅎㅎ.. 그렇다고 해서 딱히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었기에, 기억을 최대한 살려 후기를 남기려 한다. (스포有)


<1987>은 6월 민주 항쟁을 다룬 영화이다. 주입식 역사교육으로 인해 역사 공부를 극혐했던 나는(변명) 6월 항쟁을 포함한 민주화 운동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6월 항쟁에 대해 아는 거라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는 말도 안되는 말 정도였다. 게다가 나는 사람들이 죽고 다치거나 유혈이 낭자한 영화를 꺼리고, 영화를 보기 전 SNS에서 많이 접했던 비평이, 민주 항쟁에서 여성을 아예 지워버리고 알탕영화가 되어버린 이 영화를 보이콧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은 주로 자기 어머니의 운동 경험과 함께 말해졌다.) 그래서 영화를 볼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김태리가 멋진 운동권 언니로 나올 거니까 하는 기대와 덕심을 갖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따흐흑)


-웰메이드 영화, <1987>-

요즘의 한국 상업영화는 너무 뻔하다. 영화의 초반은 코미디적으로 구성해 웃음을 뽑아내고, 뭔가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서 긴장감을 일으키다가 마지막엔 감동과 따뜻함을 주어서 관객들을 엉엉 울게 하고 끝난다. 영화 하나로 극단적 감정기복을 구현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낸다. 감정의 극단적인 흐름을 구성하기 위해 개연성 따위는 "영화니까." 라는 변명으로 가뿐히 무시해 버린다. 그래서 상업영화를 함께 관람하는 관객들이 훌쩍이고 있으면, 난 왠지 시니컬해져서, 여기서 울면 작가와 감독의 뻔한 농간에 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반면 <1987>에서는 이런 격정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톤으로 담담하게 팩션을 그려내고 있었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는 메인 스토리가 있으면서도 다양한 위치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민주화 투쟁을 하는 구성 역시 맘에 들었다.


한국 영화 특유의, "시끄러울 땐 빵!!! 대사는... 웅앵웅...쵸키포키..." 도 없었다. (사족 : 뽜ㅏㅇ!!!웅앵웅 쵸키포키.. 에 완벽히 부합하는 영화는 <군함도>였다. 엄청 시끄럽고 정신 없었는데 대사는 뭐라고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비록 김윤석 배우의 이북 사투리는 알아듣기 힘들긴 했지만 말이다. 경상도 사투리를 알아듣기 힘들다는 사람들이 이런 느낌을 받는걸까.


웰메이드 영화답게, 인위적인 감정의 과장은 없었지만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영화는 뜨거웠다. 특히 연희와 시민들이 각성을 하고, 문소리 배우의 목소리로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가 울려 퍼지는, <레 미제라블>의 오마쥬 부분에서는 뭉클함, 웅클함 정도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이 때,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오는데, 2017년에 오염되어버린 태극기라는 기표에 원래의 의미를 되찾아주기 위한 강력한 의도가 느껴졌다. (그렇지만 태극기를 완전히 되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연희'라는 캐릭터의 서사에 대하여-

영화 <1987>에 대해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아쉬워하는 부분 중 하나는, 연희라는 캐릭터의 서사일 것이다. 나는 사전에 영화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안 찾아보고 가서, 김태리 배우가 체크남방을 입고 짱돌 던지는 장면을 기대하고 영화관에 갔는데 정말로 경기도 오산이었다.


연희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수동적인 캐릭터로 나온다. 운동권을 싫어하고, 운동권 삼촌이 도움을 부탁할 때도 마지못해 나선다. "그런다고 세상이 변해요?" 같은 염세적인 대사도 던진다. '멋진 운동권 오빠'의 희생을 통해 민주 시민으로 각성하는 부분은 이 서사의 정점이다.


물론 1987년 당시 이런 여성도 존재했겠지만 문제는 연희라는 캐릭터가 <1987>의 유일한 여성 주연이고, 어떠한 집합에서든 여성 개인은 과잉 대표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엑스트라를 포함한 기타 등장인물 중에서 애써 운동권 여성 주체를 찾아보는 착즙기-인간이 아닌 관객은, 민주화 투쟁 당시 남성만 고군분투하고 여성은 제한적인 역할만 수행했을 것이란 착각을 할 수도 있겠다.


한편, 연희에게는 로맨스 서사가 잠깐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한국의 관객들, 특히 이 영화의 주요 (타깃) 관객층인 운동권, 진보적인 청년, 힙스터 등은 수사하다가 연애하고, 환자 치료하다가 연애하고, 회사 일을 하다가 연애하고, 어쨌든 연애하고 연애하는 K-로맨스 서사에 염증이 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유일한 여성 주연이 운동권도 아닌데 로맨스까지 한다...! 그래도 나는 영화 전반과 조금은 다른 그림체로 묘사된 잠깐의 로맨스가 좋았다. 뜨겁고 암울하고 어두웠던 그 시기에도 24:7 투쟁모드가 아니라 사랑이 있고 일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부족한 여성 서사-

이 영화에 대해 비판을 쏟아내는 80년대 학번 대모님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각오를 하고 영화를 봐서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알탕영화와 여성혐오적인 요소가 들어간 영화를 많이 봐서 역치가 높아졌기 때문인지, 영화를 보면서 페미니즘적 착즙을 완료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셋 다인지 나는 이 영화가 그닥 불편하지 않았다. (착즙 : 민주 항쟁에 참여하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스치듯 등장한다. 한열과 연희를 숨겨 주는 신발가게 주인, 시위를 하다가 봉고에 태워져 어딘지 모르는 곳에 떨궈지는 여자들, 한열의 친구인 운동권 대학생, 시위에 참여하는 여성들 등등..) 그냥 K-상업영화 답지 않게 완성도가 높고 담백하다는 생각을 하며 재미있게 보고 나왔다. ※그래도 벡델 테스트는 통과하지 못한다! 이름이 있는 여성 등장인물이 한 명밖에 없기 때문.※


GV에서 <1987>에 여성 서사가 부족하다는 질문에, 장준환 감독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만들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 라는 뉘앙스의 대답을 했고, 많은 사람들의 어처구니를 빼앗았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고 저 대답이 어떤 의미였던 건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영화에 원톱 혹은 투톱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지만 어쨌든 중심인물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모두 남성이므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을 때 남성 위주의 스토리가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절한 설명이 없을 때 감독의 저 대답은 "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한 여성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 설마 장준환 감독이 그런 의미로 말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글을 쓰면서 써치해보니 설마가 사람잡지 않았다. 이후 GV 직캠 영상)


여기까지가 영화를 본 직후에 들었던 생각이고, 지금은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30년 뒤에 <2017> 영화가 제작되었고 내가 그 때까지 살아서 그 영화를 봤는데, 이대생들이 등장하지 않고 군중들 사이로 무지개 깃발이 보이지 않는다면 조금은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여대 학생들의 행진 장면 떼샷이라도 3초정도 끼워넣었더라면 아쉬움이 조금은 덜했을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1987과 2017-

영화를 보며 머릿 속 생각의 가장 큰 비중은, 2017년 대한민국에서 또 한번 일어난 민주화 투쟁을 살짜기 겪은 경험과, 30년 전의 민주화 투쟁을 그린 영화를 비교하는 것이 차지하고 있었다. 1987년은 참 신기하고 모순적이었다. 허위 자백 또는 밀고를 받기 위해 고문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최루탄을 쏘고, 시위대와 전경은 육탄전을 벌인다.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반면, "법대로 합시다."를 외치는 검사가 있었다. 그 시대에도 민주적인 법이 있었다는 게, 비-민주적인 일이 공공연히 일어나는 현실과 모순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이 있어도 지켜지지 않는 시대였던 걸까? 그러면 그 법은 언제 어디서 왔던 것일까? 고문치사 사건에 분노할 수 있는, 공권력에 반대할 수 있는 시민의식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영화에 등장한 대학가의 분위기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만화동아리에서 5·18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학교 정문에 모여 시위를 진행한다. 지금 그랬다면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쟤네는 공부 안하고 뭐하냐', '왜 시끄럽게 하냐' 따위의 소리를 듣고 '만화동아리는 빨갱이 동아리다.' 같은 종북 몰이가 일어날텐데. 학교 앞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의 사진이 올라오면서 신상털이와 외모품평, 성희롱 등이 일어날텐데. 이런 분위기 변화는 우리 세대가 퇴보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느 정도 진보했기 때문일까?


나는 사회가, 그리고 대중이 항상 기득권의 입맛에 맞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최근의 촛불 시위도 모든 국정농단을 박근혜와 최서원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고 나머지 적폐들은 빠져나갈 수 있는 구실로 작용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하지만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영화 속에서는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최루탄이 날아다니고, 자칫 잘못하면 고문을 당하고, 죽을 수도 있는데 시민들은 용기를 낸다. 택시 기사들이, 넥타이 부대가, 대학생들이 길을 막고 반-정부 행진을 하고, 투쟁은 승리로 끝난다. 대중을 움직인 힘이, 대중에 속해있는 수많은 개인의 정의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진다. 나도 희망을 가져도 되는 것일지.


안타깝게도 1987년에 뜨거웠던 사람들 모두가 아직까지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고, 정부에서 내려온 보도지침을 과감히 무시하고 사건을 보도하는 장면은 21세기를 사는 나에겐 조금 낯선 장면이었다. 최루탄을 맞아가며 시위하던 사람들 중 완전히 꼰대 아재가 되어 기득권을 수호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나는 30년 뒤에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Posted by 퍼포린
아주짧은글2017. 6. 24. 10:46


나는 울지 않았는데 함께 관람했던 사람들이 영화 내내 울었다.

길고양이들과 인간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려면 무해한 음모 수준의 계획을 은밀히 진행해봐야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언젠가는 한국의 길냥이들도, 인간을 무서워 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ㅋㅋ) 날이 오겠지. 오스트리아에서 만났던 길고양이들처럼.

*영화관에서 포스터를 갖고 오고 싶었는데 포스터가 없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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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후기2017. 6. 8. 03:44

짧게 써보는 서프러제트 감상 후기

1. 등장인물들이 치는 대사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었고 대부분의 대사는 현대의 우리에게 하는 말 같았다.

모드 와츠가 처음 구속되었을 때 "당신 서프러제트지?"하고 묻는 것이나 팽크허스트가 "포기하지말고 싸우세요" 하는 것들을 포함한 많은 대사들이. 깊은 감정 이입을 하며 봤다.

2. 모드 와츠가 남편에게 "우리가 딸을 낳았으면 그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고 물었더니 남편은 "당신 삶과 같은 삶을 살았겠지." 하고 대답한다. 모드는 이 대답을 듣고 서프러제트 운동을 해야겠단 맘을 더 굳게 먹지 않았을까.

3. 모드는 서프러제트가 된 지 얼마 안됐지만 오랫동안 운동을 해온 에밀리나 바이올렛, 이디스는 얼마나 지쳤을까?

4. 아내 없으면 밥도 못 챙겨먹고 애도 못 키워서 다른 사람에게 입양 보내는 남편은 참으로 한심하다.

5. 고문 장면이 나오는 줄 몰랐는데 다른 매체에서 나오는 것처럼 피튀기고 그런 건 아니었다. 그래도 너무 끔찍했다ㅠㅠ

6. 이디스의 남편은 서프러제트를 도왔단 이유로 감옥에도 몇 번 갔다온 사람인데도 마지막 운동 때 아내의 건강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경마장에 가려는 아내를 가둔다. 그 장면에서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2016년 7월 9일에 작성한 글

Posted by 퍼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