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 시절, 친구들과 몰래몰래 보던 슈퍼스타K4는 큰 위로였다. 얼른 수시 합격하고 무대를 생방송으로 보고 싶단 마음에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많은 무대 중에서도 단연 우리를 설레게 했던 건, 두 미남의 "먼지가 되어" 무대였다. 경쟁 무대였지만 완벽한 하모니였고, 둘 중 하나는 떨어져야 하는데 심사위원이 '슈퍼패스'를 사용해서 둘다 합격할 수 있었던 감동의 무대였다.
난 무사히 대학에 합격했고 날 빠져들게 했던 그 가수, 정준영의 첫 미니앨범이 나왔다. 슈퍼스타K4에 내가 덕질하던 가수가 출연하면서,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많이 친해졌고, 그 분이 소개시켜준 것인지 미니앨범의 크레딧엔 익숙한 이름들이 자주 보였다. 나는 그 미니앨범의 모든 곡을 사랑했다. 그 곡들에 담겨있던 설렘, 아픔, 반항심, 똘끼를 사랑했다. (지금은 버렸지만)앨범을 구매했고 듣고 또 들었다.
그랬었는데... 그는 몇년 뒤 성범죄자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덕후까진 아니었고, 라이트한 팬 정도였지만 그래도 배신감이 적지 않았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내 최애가 걱정되었다. 영화 <성덕>의 오세연 감독은 그의 '성덕'이었다. 팬싸인회에 가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도 가수가 이름을 써주는. 다른 누군가의 덕후가 되어본 사람으로서, 내 삶과 인간관계가 그를 중심으로 재편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화에 유독 기차 타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기차를 타고 최애를 만나러 가는 그 마음이 느껴져서 나는 마음아팠다. 범죄 사실이 드러나고 얼마나 상실감이 컸을지. 연예인은 일반인인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지만서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만큼 범죄 사실이 밝혀졌을 때 더 비난 받게 되고,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다.
'먼지가 되어'와 함께 나타났던 그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감독님이 정준영의 팬이었다는 건 우연히 알고 봤어서 정준영 얘기가 나올 것이란 건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지만, 영화는 그 뿐 아니라 다른 성범죄자 연예인과 그 덕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영화 중반부에 또 나를 많이 위로했던, 하지만 성범죄자가 된 이의 덕후가 나와서, 깜짝 놀랐으면서도 참담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 외국 생활을 할 때 외로웠던 내 마음을 많이 달래주었던 사람이 성범죄자라니.
어두운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영화 <성덕>은 최소 10분에 한번 빵터지는 장면이 있는 블랙 코미디 영화다. 술 없인 할 수 없는 얘기라며 요거트 막걸리를 만들어 마시자는 장면에서 터져버린 웃음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간접적인 피해자이자, 본인이 가해에 가담한 것은 아닐지 고민하는, 최애를 향한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성덕들을 위한 웃음치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여기서 이 사람이 나온다고?', '이 얘기를 이렇게 풀어간다니?' 하면서 웃기는 장면이 많아 등장인물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스포가 될 수도 있는 영화라 이만 줄이겠다. 영화 내용은 극장에서 많이 확인해주셨으면 좋겠다.
<시놉시스>
10대 시절을 바쳤지만 스타에서 범죄로 추락한 오빠! 좋아해서 행복했고 좋아해서 고통받는 실패한 덕후들을 찾아 나선 X-성덕의 덕심 덕질기를 담은, 2022년 실패 없을 올해의 최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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