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2021. 3. 10. 20:02

간담회 다시보기 : youtu.be/D0RJ0CeFQSo

 

지금 살고 있는 '방'을 구한 것이 작년 2월, 벌써 1년이 지난 일이다. 당시 방을 구하는 과정은 SPA 브랜드가 생기기 전의 청바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지금은 해외에서 수입된 SPA 브랜드에서 큰 사이즈의 청바지도 나오지만, 내가 10대였을 땐 그런 브랜드가 흔치 않았다. 옷을 사러 가면 항상 점원에게 가장 큰 사이즈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고, 대답을 듣고 실망하여 다른 매장으로 옮겨서 같은 대답을 듣는 것의 반복이었다. 뚱뚱한 내 몸이 창피했고, 점원이 나를 속으로 비웃고 있진 않을까 걱정했다.

전세를 구하면서는, 내가 가진 돈으로 만족스러운 집을 얻는 것이 불가능했다. 옷가게에서 점원이 나를 비웃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처럼, 중개인이 나를 비웃지 않을까 걱정했다. '겨우 이 정도 돈밖에 없으면서, 깔끔하고, 넓고, 외풍이 없고, 바퀴가 나오지 않고, 반지하가 아닌 집을 원하고 있는 거야?'하고. 내가 가진 돈이 이것밖에 없다는 게, 부끄러웠다.

이런 부끄러움이 나만의 감정은 아니었나보다. 간담회의 한 패널은 본인의 주거에 대해 설명하면서 주거 환경의 열악함을 이야기 하는 게 부끄럽다고 하셨고, '방 말고 집에 살고 싶다'인터뷰에 참여하는 청년들도 쉽사리 본인의 주거 환경에 대해 입을 떼지 못한다고 한다. 주거 환경을 설명하다 보면 자연스레 경제적 능력이 짐작되기 마련이니까.

간담회에서 가장 어이 없고 웃겼던 부분은 청년주택 셰어형에 비혼 이성 커플은 입주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동성이거나, 혈연 관계의 이성만 셰어형에 입주가 된다고. 만들어진 지 6개월밖에 안 된 청년주택이지만 '관례상'비혼 이성 커플은 살 수 없다고 했다. 입주예정자분이 서울시 청년주거정책과에 이러한 관례가 정책인지 문의했더니 공무원분에게서 돌아온 대답이 너무 웃겼다. '결혼하지 않은 이성 커플이 함께 사는 것을 국가가 지원해줄 수는 없지 않으냐'고. 대한민국에서는 혼인 신고를 해야만, 그 종이 쪼가리가 있어야만 정상가족으로 인정되어 섹슈얼리티 실천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현실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말이라 웃겼다.

청년주거간담회에서 임대차 3법이 왜 악법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질의할 수 있었다. 작년부터, 세입자의 임대차계약 갱신 청구권이 생겼으며, 계약 갱신시 5% 이상 보증금을 인상할 수 없게 하는 법안이 실행되었다. 세입자를 보호하려 만든 법안이지만, 내가 접한 매체들에서는 임대차 3법 때문에 전세가 폭등하고, 매물이 없어 서민들이 고생한다는 내용만 볼 수 있었다.

사실 임대차 3법을 통해 원래 살던 곳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된 세입자는 전체의 70% 정도라고 한다. 나머지 30%는 전세 신규 계약이 필요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임대인들은 기존 계약 갱신시 보증금을 크게 상승시켜 목돈을 굴리는 게 불가능해졌으니 전세로 주던 집에 실입주 하게 되고, 게다가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임대인들이 월세를 선호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 전세 매물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신규 임대차 계약 실행시에는 보증금 인상 제한이 없어 결과적으로 전세는 폭등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임대차 3법은 악법이라서 서민을 괴롭히는 게 아니고, 임대인 눈치를 보느라 누더기 입법을 했기 때문에 서민을 괴롭히게 된 것이었다. 폐지가 아니라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다. 자본주의의 끝이라 볼 수 있는 뉴욕에서도 보증금은 최대 1~2% 정도만 올리는 권고안을 지킨다는데. 우리나라는 정말로 있는 사람들의 탐욕을 지켜주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옷이 내 몸에 맞지 않는걸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내 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여성의 외모를 통제하기 위해 작은 사이즈로 나오는 옷이 잘못된 것이다. 방도 마찬가지다. 내가 돈이 없어 집다운 집이 아닌 좁은 방에 사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반지하가, 옥탑방이, 좁고 외풍이 드는 방이 존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그런 공간을 주거용으로 허가한 정책이 잘못된 것이다. 몸을 옷에 맞출 게 아니라, 옷을 몸에 맞춰야 하는 것처럼, 구질구질한 방이 집 다운 집이 될 수 있게 맞춰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집 다운 집에 살 날을 꿈꾼다.

 

Posted by 퍼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