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2018. 6. 19. 00:18

왜 내 겨털은 햄보칼 수가 엄써!!!!!


효리네 민박을 정주행 하면서, 다소 뻣뻣했던 아이유가 효리 언니를 따라 열심히 요가를 배우고 나니 유연해진 것을 보고 한 뻣뻣 하는 나도 열심히 하면 유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 근처 요가원에 등록했다.


요가를 할 때 따로 정해진 복장은 없지만, 몸을 마구 뒤집어 버리는 동작을 할 때 옷이 말려올라가거나 하면 신경이 쓰여서 동작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몸에 딱 붙는 상의와 하의를 입는 게 좋다고 했다. 나에겐 운동할 때 입는 레깅스는 있지만 작년의 다이어트 때문에 갖고 있던 상의는 모두 헐렁해져서 딱 붙는 상의는 검은색 민소매 셔츠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제모를 안 한 지 좀 시간이 지나서 반 정도 털이 성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의 털들은 색도 진하고 숱도 많고 곱슬거려서 다른 사람들의 털보다 훨씬 존재감이 크다...! 그래서 일단 첫날엔 민소매 티를 입고 위에 헐렁한 반팔 티를 입고 갔다. 가서 눈치를 좀 보고 민소매를 입을지 말지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처음으로 요가 수업을 받은 날, 나는 내가 가진 최대한의 눈치를 발휘해서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요가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대부분 반팔을 입고 있었다. 민소매를 입은 사람은 딱 한 명 있었고, 그 사람의 겨드랑이는 정말 털 하나 없이 깨끗했다. 자신이 없어져 버렸다.


그날 밤, 집에 와서 또 한번 고민했다. 밤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모를 하고 내일 민소매를 입을까? 그치만 지금까지 털을 기른 게 아깝다.

그래도 털을 마구 달아놓은 채로 팔을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요가 동작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러면 제모를 하지 말고 겨털이 잘 안 보이게 탈색을 할까? 하지만 그러면 같은 숱의 겨털이라도 덜 풍성해 보이지 않을 것 같고 그건 왠지 자존심이 좀 상하는데..

그냥 깨끗하게 제모를 할까? 하다가, 왁스 스트립으로 겨털을 뽑아낼 때의 고통이 상기되었다. 왁싱할 때 핏방울이 맺히는 건 예사인데. (면도기로 겨털을 밀면 깨끗하게 제모가 되지도 않을 뿐더러 다시 날 때 따갑다. 나는 예전에 잦은 면도로 피부가 상해서 피부과에 간 적도 있었다.) 나는 아픈 걸 잘 참지만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니까. 아, 참으로 어렵다.


왜 내 겨털은 햄보칼수가업서!!!



왜 나는 자신있게 제모를 끊을 수 없을까. 심지어 요가 수업은 다들 자기 운동 하느라 힘들어서 남 신경쓸 시간도 없고, 같이 수업 듣는 사람들은 전부 여성이었는데. 그래서 다들 여자의 겨드랑이에 털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자연스럽다는 걸 알고 있을텐데. 제모를 안 해도 되는 천혜의 환경 아닌가. 그런데도 제모 없이는 민소매를 못 입는 내가 미웠다. 내 겨드랑이도 날 미워하겠지.




밤새 고민 후 다음날 나는 요가원에 반팔티를 입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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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후기2018. 5. 14. 01:39

*이전 글

<피의 연대기> 후기-①/영화의 주요 내용과는 상관없을 것 같은 단상들

<피의 연대기> 후기-②/생리대는 휴지와 같다


<피의 연대기> 후기-③/생리와 자본주의


<피의 연대기>를 보며, 너무 분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던 부분이 있었다. 저소득층 여학생들이 생리대 살 돈이 없어 깔창을 생리대로 쓰거나, 생리 기간이 되면 수건을 깔고 누워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내용이 다큐멘터리에 나왔다. 2016년에 여러 번 보도되었고,(기사) 이후 여러 복지 정책이 시행되고 기부 및 펀딩이 있었지만 여전히 생리대는 누군가에겐 비싸다. 나의 생리 경험과 영화를 곱씹어보면 돈이 없을수록 생리에 더 큰 돈을 들이거나, 더 불편해야만 하는 모순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생리대를 직접 사본 건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그 전까지는 엄마와 함께 마트에 가서 생리대를 샀었으니까. 당시엔 소셜커머스에서 한 학기 정도 쓸 분량의 생리대를 한 번에 사서 썼었다. 그게 단가로 따졌을 때 가장 저렴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래서 생리대 가격 인하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소셜커머스에서 사면, 생리대를 싸게 살 수 있는데 왜 생리대 가격을 인하해야 하는 걸까? 하고 엄마한테 물었을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너 고등학생 때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니?"

그랬다. 소셜커머스에서 대량으로 생리대를 구매해 비용을 아낄 수 있었던 건, 대학생이 되어서 시간 여유가 늘었기 때문에 최저가 검색을 할 수 있고, 용돈이 늘어 한 번에 결제할 수 있는 금액이 커져서 가능한 거였다.


2년 전부터 나는 탐폰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국산 탐폰을 썼고, 생리대를 쓰다 탐폰을 쓰니 완전 신세계였다. 냄새도 안나고 살이 짓무르는 일도 없었다. 생리혈이 새서 옷에 묻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생리대보다 좀 더 자주 갈아야 하고, 소셜 커머스에서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없어서 돈이 더 들었다. 몇 달간 한국산 탐폰을 쓰다가 플레이텍스 탐폰이 훨씬 좋단 말에, 탐폰을 직구하기 시작했다. 원래 옛날엔 우리 나라에서도 플레이텍스 탐폰을 살 수 있었지만 몇 년 전에 철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탐폰을 거의 안쓰긴 하니까... 아무튼 아마존에서 플레이텍스 탐폰을 직구하면 아주 싼 가격에 많은 탐폰을 살 수 있었다. 다만 배송비가 비싸니까 많이 시켜야하는 단점이 있고.. 나는 한 번 살 때 5만원 정도를 사서 거의 1년 넘게 썼던 것 같다. 아무튼 플레이텍스 탐폰과 한국 탐폰의 편리함은 정말 천지차이였고 나는 절대로 고통스러운 한국 탐폰을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생리컵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남은 탐폰을 이곳저곳에 나눠줬고, 나는 더이상 생리 때문에 돈을 쓰지 않는다. 나는 골든 컵을 찾기까지 10만원 정도를 소비했다. 보통 생리컵 하나가 4~5만원 가량인 것을 생각하면 두 번째 만에 적응한 것이니 시행착오를 많이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청소년이나 저소득층에게는 부담스러운 돈일 테고, 성인 중에도 해외 직구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생리컵을 이용해서 편리하고 저렴한 생리를 할 수 있는 것 역시 나의 특권이었던 것이다.


10대부터 50대까지, 여성들은 생리를 한다. 생리를 한다는 사실은 평등하지만 여성 개개인은 평등하지 않다. 자본 계급과 정보 접근성에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생리 역시 자본주의적 계급에 따라 계급이 나뉘게 된다. 이런 부조리함이 나는 너무도 분했다.

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18. 4. 27. 00:45

체벌 거부 선언



제 1부. 과거의 기억


1. 언쟁

대학교 새내기 시절의 일이었다. 꽤 시간이 지난 일이라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체벌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동기와 언쟁을 했다. 그는 자기가 ‘똑바로’ 큰 건 다 모부님의 엄한 매질 덕분이라며, 자식을 키울 때 체벌은 필수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폭력을 쓸 수 있냐고 다시 묻자, “너는 맞고 살지 않아서 잘 모르나보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그렇게 언쟁은 종결되었다.


2. 반증

그의 말이 틀렸다는 대답을 하지 못했던 건 무엇보다도 나의 모부를 욕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조숙했던 10년 전의 나는 앞에서는 맘에 없는 말로 어른들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뒤에서는 맘에 들지 않는 지시를 따르지 않는, 반항아와는 거리가 먼 청소년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부님을 사랑했고, 다른 어른들을 대할 때처럼 그들을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면 난 많이 맞았다. 그들이 나를 때리는 것은 훈육이지만 내가 때리는 것은 패륜이기 때문에 맞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마다 ‘감정 조절을 하는 능력은 내가 이겼다. 저 사람들은 참 한심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맞고 있었다. 그래서 맞고 살지 않아서 체벌을 반대하는구나 했던 동기의 말에 나도 많이 맞았다는 말로 반박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정에서의 체벌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 모부의 폭력성과 무능함을 전시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제 2부. 체벌과 훈육


1. 양육자로서의 권위

나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타자를 억압 혹은 통제하는 것이 권위라고 정의한다. 상대의 의사에 반한 권위 행사는 대부분의 경우 옳지 않고, 지양해야 한다. 하지만 양육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권위가 필요할 때가 있다. 피양육자가 거부하는 것이 피양육자에게 필수적인 일인 경우에는 양육자의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권위’라는 부정적인 개념의 필요성을 설명하는데 최근의 내 경험이 모순 해소의 고리가 되었으면 한다. 일주일 전에, 나와 동거하는 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서 실수를 했다. 발이 미끄러졌는지 그는 한동안 한쪽 발을 짚지 못하고 절뚝거리며 걸어다녔다. 발톱을 깎다가 내가 실수를 해서 피가 났을 때조차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을 짓는 고양이가 그렇게 아픈 티를 낼 정도이니 반드시 동물 병원에 가야했다. 하지만 영역동물인 고양이가 제 발로 병원에 갈 수는 없기 때문에 나는 강자로서의 권위를 이용해 그의 신체적 자유를 억압하여 병원에 데려가야만 했다. 고양이와 동물 병원에 가는 것은 양육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피양육자가 싫어하는 행위를 강요하는 것이므로 일종의 권위 행사이기도 하다. 만약 같은 상황에서 의사 소통이 가능한 인간 아이를 양육하는 상황이었다면 먼저 대화를 시도했겠지만, 설득이 불가능하다면 어쩔 수 없이 양육자로서의 권위를 행사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양육자로서의 ‘권위’이다. 나에게 이 오염된 단어를 대체할 새로운 언어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2. 체벌의 불필요성

시간이 흘렀고, 나는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함으로써 피훈육자로만 살아오다가 훈육자가 되는 경험을 했다. 개인으로서의 내가 체벌 가해를 기피한다는 것을 차치하고, 당시의 경험은 체벌의 필요성에 대해 품던 의심을 체벌의 불필요성에 대한 확신으로 변하게 한 계기였다.


내가 상대했던 학생들은 초·중학생이었고 당연히, 내 말을 잘 따르지 않을 때도 많았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과정에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쪽의 말에 일방적으로 복종 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이니까. 그렇지만 제한적인 시간 동안 효율적인 학습 성취도를 이끌어내야 했던 학원 시스템 안에서 학부모가 기대하는 강사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교육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수업시간이었다. 나는 학생들이 교재를 소리내서 읽게 해야 했었다. 한 학생이 “하기 싫어요.”를 반복하며 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어서 나는 정색을 하며 낮고, 크고, 단호한 목소리로 “빨리 읽어.” 라고 말했다. 그 학생은 다소 겁을 먹은 표정을 하며 교재를 읽기 시작했다.


그 때 깨달았다. 나와 그 학생의 관계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 신체적 능력이 우위에 있는 사람과 약한 사람의 관계이므로 내가 무해함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하는 것이 학생에겐 크게 다가온다는 것을. 통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굳이 타인의 신체적 자기결정권을 빼앗는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훈육자로서의 권위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3. 체벌은 폭력이 아니라 훈육이다?

제 1부에서 언급했던 언쟁 이후,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학교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2. 반증의 내용을 간략히 올렸었다. 그 게시글에 달린 댓글의 대부분은 “체벌은 폭력이 아니라 훈육이다.”라는 말도 안되는 내용이었다. 먼저, 체벌은 타인의 신체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폭력이 아닐 수가 없다. 둘째, 체벌이 훈육의 효과가 있는지도 불분명할 뿐더러 2. 체벌의 불필요성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체벌을 하지 않아도 훈육이 가능하다. 오히려 제 1부에서 알 수 있듯 체벌은 양육자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셋째, 훈육을 목적으로 체벌을 하는 것은 피훈육자에게 ‘맞을 짓을 하면 맞아도 싸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결국 폭력이 대물림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아마 내 또래들도 폭력을 정당화하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댓글을 달았을 것이다.


제 3부. 가해 거부 선언


나는 모부와 물리적으로 독립한 상태이며, 곧 경제적 독립을 이룬다. 따라서 현재의 나는 체벌 피해자가 될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앞으로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상태이다. 비청소년이자 비당사자의 위치에서 아수나로의 체벌 거부 공동행동에 참여하며 다음과 같은 선언을 남긴다.


        1. 나는 체벌을 하지 않을 것이다.

        2. 나는 체벌을 강요하는 구조를 거부한다.

        3. 나는 체벌 거부 운동을 포함한 청소년 인권운동에 연대한다.



2018년 4월

퍼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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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아주짧은글2018. 1. 20. 16:18

백인 미국인은 한국인을 어떻게 볼까?(기사 본문 링크)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고 방식과 행동이 아무 맥락없이 짠 하고 생성되기 보다 많은 부분이 사회의 합의/규범의 안에서 생성된다. 적당한 규범이 성립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눈치 보다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따라한다’가 많은 사람들의 행동 규칙이다. 예컨대 방에서 ‘불’이 나도 혼자인 경우에는 본능을 따라 바로 도망가지만, 여러 사람들이 존재하게 되면 어떻게 할지 서로 눈치부터 본다. 그러다가 결국 혼자일 때보다 대피가 늦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


어떤 경우에라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혹은 모두가 YES 또는 NO 라고 할 때 혼자 반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드물다. 이렇게 행동 규범을 외주하는 인간으로서 차별주의자들 (및 차별에 대해 평소 별 다른 생각이 없던 사람들)의 경우 자신과 같은 차별주의자, 또는 적어도 차별을 방관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메시지는 이제부터는 ‘차별해도 된다’는 허용이다. 이미 가지고 있던 차별과 생각 없음을 꺼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차별을 밖으로 휘두르는 것과 그러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오랜만에 과학 동아 기사를 찾아 읽었다. (아주 좋은 기사였다!)

"행동 규범을 외주하는 인간으로서 차별주의자" 를 아주 한심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스스로 생각이란 걸 못하니 본인이 타자로 존재하는 집단에서 차별을 당함으로써 그들이 강제(타의) 역지사지 해보길 바랐다. 그렇지만 나도 행동 규범을 외주하고 있지 않나. 페미니스트이고 다른 여러 소수자들의 인권 운동에 연대하기로 결정했지만, 그 결정 역시도 인권 감수성을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게 한 주변 환경 덕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그럼 이것은 외주가 아닌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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