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2024. 2. 16. 20:00

아이유의 '홀씨' 공개에 부쳐.

아이유의 "Love wins" 티저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아이유가 대국민 커밍아웃을 하나?' 라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했었다. 하지만 나를 빼고는 그런 상상을 한 사람이 없었나보다. 평소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지지발언을 한 적 없던 사람이 그 구호를 쓰는 건 문화 전유라는 비판이 쇄도했다. 이어 곡에 대해 설명하는 손편지가 공개되었고, "Love wins"가 성소수자 지지의 의미를 담은 곡이 아닌, 팬송이라는 사실에 비판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이담엔터테인먼트에서는 노래 제목을 "Love wins all"로 바꾸고 다양한 모습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두를 더욱 존중하고 응원하겠다는 메시지를 냈다. 나는 그런 결정이 제법 고무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유라면 비판의 목소리가 있음에도 신경쓰지 않고 고집스럽게 활동을 이어나갈 거라고 예측해서이다. 그는 대스타이지만 여성이라 여러 번 억까에 시달렸었고, 억까에 익숙해지면 본인을 향한 비판조차 억까로 해석하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악플에 대해 논의할 때 비판은 괜찮고 비난은 나쁘다는 식으로 이야기되곤 하지만 사실 부정적인 목소리 구름을 딱 잘라서 비판과 비난으로 나누어 비판은 수용하고 비난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제목을 바꾼 노래는, 뮤직비디오가 먼저 공개되고 음원은 조금 뒤에 발매되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나는 '이건 진짜 망했는걸. 욕을 많이 먹겠는걸' 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노래 가사만 들으면 퀴어 서사를 착즙해볼 여지가 있으나, 뮤직비디오는 너무나도 예쁘고 멋진 여성과 남성의 사랑 이야기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거기다 장애를 아름답지 못한 대상으로, 비장애를 낭만적인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비판도 얹어졌다.

티저 발표 이후에 나오는 목소리들을 보는 것은 굉장히 피곤했다. 논란 자체가 피곤했다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보는 것이 피곤했다. 아이유에 대해 관심도 애정도 없는 사람들이 건수 잡았다는 듯이 내던지는 부정적 의견이 너무나도 보기 싫었다. 작년의 나는 10번 중 9번을 잘해도 1번을 잘못하면 문제적인 인물로 낙인찍고 손절하고 비난하는 행위를 하지 않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그들은 그런 행위를 스포츠처럼 즐기는 것 같았다. 아이유가 이렇게 된 이상 장애인, 성소수자 인권운동 단체에 기부해야 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남에게 돈을 맡겨놨는지, 본인은 운동에 제대로 참여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Love wins" 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만 쓰이는 말이 아닌데요? 이러고 있는 일부의 유애나도 꼴보기 싫었다. 본인이 무지한 것은 자랑스럽게 내보일 게 아니다. 편을 나눠 싸우는 것이 보였으나 어느 편에도 서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 유애나로서 애정어린 비평을 나눠준 분의 글이 있어 공감이 많이 되었다. (https://posty.pe/h7z9a6)

'Love wins all' 뮤직비디오 공개 이후에도, 앞으로 나올 미니 앨범에 대한 티저가 발표되었고, 오늘은 '홀씨'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가 올라왔다. 이번 논란 이후에 아이유의 무언가가 발표될 때마다 이번엔 어떤 구설이 생길지 불안했다. 홀씨 뮤직비디오가 올라오자마자 시청했고 문제될 건 없어보인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Love wins all' 뮤직비디오를 봤을 때, 장애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캐치하지 못했으므로 이번에도 내가 알아채지 못한 문제점이 있을까 싶어 아직 불안한 마음이 해소되진 않았다.(나의 부족함으로 뮤비 등장인물이 장애인이라는 것조차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가수 본인도 나처럼 두려우려나. 아니면 그저 내가 유리멘탈인 걸까.

덧 1. 손편지에서 언급되었던 '대혐오의 시대'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혐오는 옛날부터 있었고 지금은 혐오라는 언어 표현이 생겼으며 소수자들이 투쟁하는 시대이다.

덧 2. 아이유 콘서트는 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므로 티켓팅이 어렵다. 그래서 (정말 나쁘고, 내놓기 부끄러운 마음이지만) 이번 일로 탈덕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3월 콘서트 예매 대기순번이 역대급으로 뒤쪽이었다.(그래도 티켓을 구해서 다행이야)


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23. 9. 17. 00:53

런던 퀴어 퍼레이드가 있던 날, 최고 기온은 24℃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날씨와 비슷했다. 런던은 걸핏하면 비가 오기로 유명하지만, 이날은 아침 일찍 잠깐 비가 내리고 그쳤다. 영국은 서안 해양성 기후라서, 여름이지만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화창하고 맑은 하늘, 시원한 바람, 그리고 무지갯빛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사람들은 예술적이었다... 사람들이 밀집된 곳에 있다 보니 옆에 있는 사람들과 팔뚝 살이 접촉될 때가 있었는데, 시원하고 건조한 날씨라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런던 퀴어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 하얀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이고, 빨주노초파남보 비행기가 등에 그려진 검은 티셔츠를 입은 작성자가 중앙 하단에 서있다.관중 속의 작성자가 무지개 배경색에
퍼레이드를 기다리며 슬로건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가리고 게시할지 고민했는데, 이름 모르는 외국 사이트에 게시되는 건 조금 불쾌할지도 모르겠어서 가까이 나온 얼굴은 블러 처리했다)

트라팔가 광장 앞 길가에서 잠깐 기다리니 퍼레이드가 트라팔가 광장 앞으로 지나갔다. 행진 경로 옆에 가득 있던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고, 다들 즐거워했다. 여러 단체와 기업의 트럭을 따라 소속된 사람들이 행진을 이어갔다. 각자 만든 피켓이나 현수막을 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푸른 하늘 아래, 퀴퍼 참여 단체의 트럭이 지나간다. 많은 관중이 맞아주고 있다.푸른 하늘 아래, 퀴퍼 참여 단체의 트럭이 지나간다. 많은 관중이 맞아주고 있다.
푸른 하늘 아래, 퀴퍼 참여 단체의 트럭이 지나간다. 많은 관중이 맞아주고 있다. 무지개 깃발이 많이 보이고,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도 있다.푸른 하늘 아래, 퀴퍼 참여 기업인 United Airlines의 트럭이 지나간다. 많은 관중이 맞아주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관중도 있다.
프라이드 행진이 지나가고, 길가에 서있던 많은 관중은 환호했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버로우마켓에 가려고, 행진이 다 지나가기 전에 자리를 벗어났다. 템즈강을 따라 걸어가는 길은 내내 축제 분위기였다. 음악이 들려왔고, 무지개 옷을 입고 페이스 페인팅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Protect Queer Children'라는 문구가 무지개 깃발 밑에 쓰여 있는 모양의 남색 티셔츠를 입고 가던 할아버지들이 인상 깊었다. 다이소에서 산 비눗방울 기계를 목에 걸고(어릴 적 간절히 원했던 사치를 이제는 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5천원 주고 구입했다.) 비눗방울을 뿌리며 걷고 있었는데 얼굴에 트랜스젠더 플래그를 그리고 분홍 티셔츠를 입은 분이 극 F스럽게 "오마이갓! 쏘 뷰티풀!" 하고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눈이 마주치면 "Happy Pride!"하고 인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분이 좋았고 재미있었지만, 사실은 내향인으로서 기가 조금씩 빨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트라팔가 광장 근처를 걷던 도중에, 누군가가 나에게 팸플릿을 줬다. 한국에서 집회에 가면, 종종 관련된 의제에 대해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들이 있기에(가령 기후 정의 집회에서 습지 매립 반대 전단지를 나눠준다든지) 그런 건 줄 알고 "Thank you."라고 말하면서 받았다. 그런데 팸플릿 앞면엔 Jesus 어쩌고저쩌고가 적혀있고, 별로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팸플릿을 나눠준 사람을 보니 TPO에 맞지 않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혐오 세력이었던 것이다...

무지개 옷을 입거나 깃발을 든 사람들 사이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둘 보인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빨간 화살표로 표시해 두었다.
런던 퀴퍼의 혐오 세력은 개별적으로 움직인다.

즐겁고 신나고 기 빨리는 런던 퀴어 퍼레이드가 끝나고, 나처럼 런던 퀴퍼에 참석한 한국인이 있는지 네이버 블로그 검색을 해보니, 행사 당일에 후기를 올린 부지런한 사람이 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여자분이 쓴 것 같았는데, 런던에서 우연히 퀴퍼를 보게 되었는데 특이해서 찾아보았더니 한국에서도 매년 한다더라, 그런데 런던에서도 퀴퍼 반대한다며 설교하는 목사가 있었고, 한국에서도 반대 집회를 하는 걸 보면 세계 어디든 사람들 정서가 비슷한가보다, 하는 글이었다. 나는 그 말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다. 런던 퀴퍼에도 혐오 세력이 있긴 했으나, 한국 개신교에서 반대 집회를 진행하는 데 비해, 런던의 혐오 세력은 조직화되어있지 않았고 한 명씩 전단지를 나눠주거나 행렬에 욕을 하거나 그런 식이었다. 런던 도시 전체에서 프라이드 플래그를 찾을 수 있었고, 대로 위에 프라이드 플래그를 걸어놓은 곳도 있었다. 지자체 협조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로 위에 만국기처럼 퀴어 프라이드 플래그가 걸려있다.
런던 중심지 도로에 퀴어 프라이드 플래그가 걸려있다.

지하철에 있는 런던 프라이드 안내 광고는 시장 명의로 되어있었고, 런던 시장은 늘 퀴어 퍼레이드의 선두에서 행진한다. 혐오 세력과의 충돌이 염려되지 않으니, 행사에 배치된 경찰의 수도 비교적 적었고, 경찰분들은 어깨에 무지개 견장을 달고 있었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듯, 런던의 성소수자들도 나름의 차별과 억압을 겪고 있겠지만, 적어도 프라이드 주간에 내가 여행자로서 겪은 것은 런던은 성소수자를 환대하는 곳이었다. 서울과는 다르게.

왜 런던과 서울은 이렇게 다를지 궁금했다. 몇십 년 전엔 국경을 오가기도 쉽지 않고 나라마다 발전 속도가 달랐겠지만, 지금은 비행기로 갈 수 있고 세계 시민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한국도 영국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인데 무엇이 퀴어 퍼레이드 풍경을 이렇게 다르게 만들었을까?

그날 밤엔 숙소 창가에 서서,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런던 아이를 보며 레드 와인을 마셨다. 런던 아이는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그것에 맞춰서 조명을 바꾼다고 한다. 북적이는 외향적 파티가 끝나고 찾아온, 달고 소중하고 조용한 시간이었다. 다음에는 꼭 겨울에 런던 여행을 해야지.

창틀에 레드와인 한병과 버터 비어 컵 두개가 놓여있다. 어두운 밤 창문 뒤로 무지갯빛 런던 아이가 보인다.
무지개 런던 아이를 보며 해리 포터 스튜디오에서 버터 비어를 마시고 가져온 컵에 레드 와인을 마셨다.

 

무지개색으로 돌아가는 런던 아이

 

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23. 9. 10. 01:26

7월 1일에 런던 퀴퍼가 있었으니, 다녀온 지도 벌써 2달이 지났다. 늦은 후기인 듯하지만 나혜석이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약 4년 뒤에 여행기를 썼던 걸 생각하며 지금도 늦지 않은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17년부터던가? 그때부터 서울 퀴어문화축제에 매년 갔기에, 올해는 영국 여행 때문에 가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서울 퀴퍼 날짜가 확정되기 전 런던행 비행기표를 예매했으니까. 여행을 준비하며 문득, 그렇다면 런던에서는 퀴어 퍼레이드를 언제 하는지 궁금해졌고, 구글에 'London Queer Parade(런던 퀴어 퍼레이드)'를 검색했다. 바로 공식 홈페이지가 나왔다. 놀랍게도 서울과 같은 7월 1일이었다!

사실 대학생 때는 서울 퀴퍼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던 게, 보통 6월 마지막주엔 1학기 기말고사가 있는데 퀴퍼는 항상 시험 직전 주말에 열렸었다. 주로 벼락치기로 시험을 보는 나에게, 시험 직전 주말은 하루도 날릴 수 없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퀴어 퍼레이드의 계기가 된 사건인 스톤월 항쟁이 1969년 6월에 일어나서 그때 행사를 하는 것이므로, 왜 하필 시험 기간에 하냐고 툴툴거리기도 어려웠다.

시험기간 덕분에 퀴퍼는 6월에 하는 거라고 기억하게 되었는데, 7월에 런던에서 퀴퍼를 한다니! (비록 애매한 7월인, 7월 1일이지만) 생애 최초로 해외 퀴퍼에 갈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런던 여행에서 토트넘홋스퍼 구장 투어, 해리포터 스튜디오, 뮤지컬 등등 재미있는 이벤트를 많이 계획했지만, 퀴퍼는 예상치 못했던 이벤트였다.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행진 경로가 나와 있었다. 시청 광장에 모인 누구라도 행진에 참여할 수 있는 서울 퀴어 퍼레이드와는 다르게, 런던의 퀴어 퍼레이드는 사전 신청을 해야 행렬에 낄 수 있었다. 3만 명에서 4만 명 정도가 행진을 하는데, 행진 경로 가장자리에 서서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런던 시내 곳곳에 테마별로 6개의 무대행사가 있었고, 메인무대인 트라팔가 스퀘어에서는 디즈니 영화 <겨울왕국>에서 엘사 역할을 했던 가수인 이디나 멘젤의 무대가 진행된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행진의 시작에는, 늘 그렇듯이 런던 시장이 선두에 선다고 했다. 한국의 오세훈 서울시장은 장소 대관을 막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리고 런던에서는 '퀴어 퍼레이드' 보다는 '런던 프라이드' 혹은 '프라이드 인 런던'이라는 단어를 더 흔하게 쓰는 것 같았다.

Parade Details
The parade will see around 600 groups made up from LGBT+ Community Groups&#44; LGBT+ businesses&#44; and partners&#44; forming together to make our total over 32&#44;000 participants. As usual&#44; the Mayor of London will be leading the parade!
Applications for groups and organisations to participate in this year&#39;s parade is now closed. If you would like to be a part of the event&#44; join us along the route or at one of the stages (see below)
런던 프라이드 홈페이지에 안내되어 있던 행진 경로
어떤 번화가 길거리에 프라이드 행사 스폰서와 6개의 무대 안내가 있었다.

런던 프라이드는 이번 런던 여행의 5일 차 일정이었는데, 런던에 도착했을 때부터 거리 곳곳에 무지개가 걸려있었다. 음식점, 회사, 교회는 창문에 퀴어 프라이드 플래그 테이핑을 하거나, 문 앞에 깃발을 걸어놓고, 길거리 가판대와 타바코샵에서는 무지개 깃발과 모자 같은 아이템을 팔았다.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땐, 거리 곳곳이 무지개인 것이 신기해서 발견할 때마다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는데, 며칠 지나니 흔하게 보이는 퀴어 플래그에 조금은 시큰둥해졌다.

테스코 익스프레스의 프라이드 플래그 테이핑
King&#39;s Cross Station
Celebrating Pride
킹스크로스역의 프라이드 현수막
무지개색 스테인리스 워터보틀에 토트넘 로고인 축구공 위의 닭이 그려져있음
토트넘홋스퍼 구장에서 사온 프라이드 워터보틀
무지개 퀴어 프라이드 플래그에 &quot;Celebrate With Pride&quot;라 적혀있고&#44; 아래쪽에 다양한 정체성의 프라이드 플래그가 있음
화장품 가게의 깃발 테이핑

 

햄버거 모양 로고가 무지개 및 트랜스젠더 플래그 색으로 되어있음
쉑쉑버거의 프라이드 로고
DANCE WITH PRIDE 라는 글자를 무지개색으로 적어놓은 창문
발레용품점 창문

사실 런던 프라이드 행사 하루 전날, 정보를 알아보다가 22년 행사 참석자는 1.5 million(150만 명)이었단 걸 보고 잠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민족정론지 보도를 보면 23년에도 비슷한 수의 인파가 모였던 것 같다. 겨울 비수기의 런던을 떠올리며 비행기 티켓을 끊었던 나는 런던 시내의 끝없는 인파에 지친 상태였지만, 쉬고 싶단 마음을 힘겹게 떨치고 호텔 문을 나섰다. 메인 스테이지인 트라팔가 광장까지는 숙소에서 금방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서, 차량 통제된 도로를 걸어 행진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았다.

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23. 9. 9. 16:56

4월. 여행 두 달 전이었지만 그래도 유명한 관광지이다 보니 여전히 숙소 선택지는 많았다. 그리고 정말... 정말 비쌌다. 원래 5박 100만 원 정도에 예약하는 게 목표였는데, 그 가격을 만족하는 호텔은 반지하거나 창문이 없거나 런던 중심부에서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멀거나 그랬다. 그래서 예산을 200만 원으로 올렸고... 베드버그가 없는지, 창문이 있는지, 교통이 편리한지(지하철역이 근처에 있는지) 위주로 체크해서 숙소를 골랐다.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관광을 더 많이 할 것이라서 방이 넓진 않아도 괜찮았고, 난 힘이 세기 때문에! 20kg짜리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것도 상관없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숙소 후보는 원헌드레드 호텔과 어셈블리 호텔이었다. 원헌드레드 호텔은 미국에도 있는 호텔 체인인데, 1층에 바가 있다고 했다. 방 디자인도 예뻤고, 그 호텔 체인의 덕후(?) 가 있는 브랜드라고 했다. 어셈블리 호텔은 소호와 코벤트가든 사이에 있었다. 전에 런던 여행을 갔을 때, 소호 The french house에서 London Pride 맥주를 한 잔 했던 기억이 좋았고, 거기가 제일 중심지인 것 같아서,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런던에 다시 온다면 소호에 묵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서 숙소를 어셈블리 호텔로 정했다.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를 일이 없었다.

런던아이 사진빅벤 사진. 왼쪽에 공사장이 보임
숙소 창문으로 보이던 런던아이와 빅벤. 흐린 날씨였다.

원헌드레드 호텔을 숙소로 정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유럽 여행 카페에서 본 댓글 때문이었다. 그 호텔은 쇼디치에 있는 곳이었는데, 런던 중심지인 트라팔가 광장에서 20~30분 정도 걸렸다. 여행 카페에 '쇼디치 숙소'를 검색하니까 , '만약 당신의 외국인 친구가 서울 여행을 온다면 명동에 숙소를 잡으라고 하지, 동작구에 숙소를 잡으라고 하지 않을 거잖아요?'라는 댓글이 있었다. 그 말에 공감되어서 소호의 숙소에 묵기로 결정했는데...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동작구에 숙소 잡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래서 여행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나보다. 자세한 내용은 숙소 후기 편을 쓰게 된다면 그때...

어셈블리 호텔에 대한 리뷰를 검색해 봤는데, 2월에 묵었던 사람들이 1박 10만원대의 저렴한 숙소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 나는 1박에 42만원을 썼는데... 그 숙소를 예약하고, 런던에 가고, 마지막 밤을 보낼 때까지, 숙박비가 비쌌던 이유가 단지 여름 성수기이기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불현듯 깨달았다. 비싼 숙박비는 런던 프라이드(런던 퀴어 퍼레이드) 때문이었다! 나도 여행 일정 중 구경하러 갔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독일에서 옥토버페스트 할 때도, 뮌헨에서 1박에 8유로씩 하던 호스텔이 30유로가 되는 걸 봤었는데.(내가 독일에 갔던 건 약 10년 전이었으니 지금은 더 비싸졌겠지) 여름 성수기인 데다가 축제까지 겹치니까 숙소 비용이 치솟았다.

아마도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런던 프라이드가 제법 감동적이었어서, 후기를 꼭 남기고 공유하고 싶었는데, 퀴퍼 때문에 호텔비가 비쌌던 이야기를 하려고 이만큼이나 써버렸다. 얼른 런던 퀴퍼 후기도 써야지.

길거리 타바코 가판대. 무지개 깃발을 팔고 있다퀴어 플래그로 된 sohoplace 전광판
지하철역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 무지개 깃발을 파는 가판대와 퀴어 플래그 전광판을 볼 수 있었다.

 

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22. 8. 14. 00:19

페미니즘을 알게 된 이후, 일상에서 고찰할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었다. 많은 것들이 새로웠다. 몇 년 전까지는 그런 새로운 발견을 정리해서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리곤 했었다. 여러 사람이 관심을 주고,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었다. 외부 매체에 기고하는 것은 더욱 즐거웠다.

하지만 요즘은 영 업로드를 하지 못했는데, 글을 쓰지 못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절대적인 시간 부족이었다. 블로그에 자주 글을 쓰던 시기는 대학을 휴학 중일 때라 정말 남는 게 시간이었다. 지금은 퇴근하고 나서 잠시 쉬다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운동을 하고 오면 이내 잘 시간이 된다. 그 사이에는 무언가를 작성할 시간도, 작성을 위해 사유할 시간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공부도, 고민도, 생각도 거의 하지 않다보니 지적 능력이 많이 떨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회사 동료들과 이야기해보면 이것은 나만 겪는 현상이 아니었다. 심하게 말하면 "지적 능력을 팔아 돈을 번다"고 얘기할 정도로, 직장에서의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나의 지성이 사라져갔다. 정신병도 지적 능력을 퇴화시키는데 한몫했고, 애석하게도 정신병이 앗아간 총명함은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떨어졌구나' 인지한 다음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노력을 통해 조금씩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 직장에서 기술 문서를 작성해야 할 땐 속으로 오열하며 한 자 한 자 작성했었는데, 다행히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건 불가능했으나, 꾸준한 치료와 개인적 노력으로 트위터 이상의 긴 글을 쓰는 것도 어려웠던 상태는 이제 벗어났다.

글을 쓰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내보일만한 글감이 없어서였다. 대학생 때야 방학하고, 시험도 보고, 이런저런 활동을 시도해보기도 했는데 직장인의 삶이란, 아무리 들여다봐도 새로운 구석을 찾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쓰자니 내가 특정될까 두려웠다. 정치 평론을 하기에도 내가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았고, 여러 사람이 하는 이런저런 말들에 내가 한마디 더 얹어야 하나 싶었다. 그리고 나의 가치관에 비추어보았을 때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여 적을 만들고 싶지 않은 비겁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강제성이 없는 자발적 글쓰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이제 트윗 이상 길이의 글을 쓸 수 있는 정신 상태는 만들었으니 퇴사 후 발간될지도 모르는 퇴사 에세이의 소재는 종종 기록해놓을 예정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일기장에 주로 기록할 것이고, 그런 내용을 공개적으로 발행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앞으로 이 블로그에 글이 올라오게 될지도 불투명하다. 퇴사를 언급하였으나, 지금 당장은 퇴사할 생각도 없고 우리 회사가 조금은 좋다. 정년은 언젠가 다가오니까 그때쯤 모아왔던 썰을 방출하게 될지도.

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21. 4. 3. 23:23

며칠 전 팟캐스트 '뇌부자들'에서 <나는 정신병에 걸린 뇌과학자입니다> 라는 책을 소개하는 걸 들었다.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흥미로운 내용인 듯했고 좋은 책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한 문장에서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우리가 암에 걸린 사람을 비난하지 않듯, 정신병에 걸린 사람 역시 비난 받을 게 아니다." 라는 말.


지구상의 사람들은 정신병 혐오를 내면화하고 있다. '정신병'을 욕설로 쓰는 강한 혐오부터, '나는 상담이 필요한 정도까지는 아냐.' 하는 약한 혐오까지.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어서 정신과를 처음으로 방문하기까지 망설이는 시간이 아주 길었다. '내가 그정도로 아픈 것일까? 진단을 받고 나면 진단명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 건 아닐까?' 하면서.


정신/심리 관련 매체에는 그런 말들이 자주 나온다. 정신의 병은 신체의 병과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나약하거나 의지가 없어 걸리는게 아니므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사회의 정신병 혐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 치료가 필요하지만 전문가를 찾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으려면 인식개선이 필요하다. 아니, 절실하다. 하지만 "신체의 병과 같이 정신의 병도 비난할 일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아닌데. 신체의 병도 비난받던데.' 하며 실소하게 된다.


어디서 이런 말을 하고 다니진 못하지만, 아픈 사람들은 본인의 건강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특별한 계기를 말할 수가 없다. 건강 관리가 능력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정말로 자연스럽게 체화되었다. 그래서 암에 걸린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스스로의 건강을 챙기지 못한 거라며 나 자신을 질책했다. 독감이 유행할 때 건강관리 잘 하라는 말이 주변에서 자주 오가는 것을 보면, 남들도 나와 다르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바이러스의 침투는 개체의 자의적인 노력으로 막을 수 없는 것임에도 그런 말들을 주고받는다.


건강 관리도 능력이라는 말이 거짓말인 걸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나를 포함한 우리 회사 사람들은 아플 때면 병가를 쓰는 게 아니라 연차휴가를 사용한다. 며칠 없는 연차휴가를 많이 소진해서 연차를 쓰기 힘들면 아파도 참고 꾸역꾸역 출근한다.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아프게 된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면서. 


정신의 병도, 신체의 병도 잘못한 일, 비난받을 일이 아니면 좋겠다. 그렇지만 코로나 백신을 맞고 면역반응으로 고생하는 간호사들조차도 쉬지 못하고 바로 출근하는 걸 보면, 우리에겐 정말로 아플 권리가 없는 듯하다. 이런 환경에서 정신의 병이 신체의 병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게 인식 개선의 효과가 있기나 할까 싶은 씁쓸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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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20. 11. 23. 22:44

지난 6월이던가 7월이던가. 내 안에서 뭔가가 폭발하듯이 '뚝'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회사에서 업무상 필요한 일을 해야 하는데,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공식적인 업무 요청 없이 다른 동료의 호의만 믿고 업무 지시를 해야만 했다. 동료는 바빠서 연락이 잘 되지 않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사이에 타이밍을 놓쳤다. 어떤 일이었는지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나는 며칠간 긴장해 있었고, 일이 실패하자마자 힘이 쭉 빠졌다.

생각해보면 올해 시작한 이 과제는 계속 이 모양이었다. 아니, 이 부서에 온 작년부터 그랬던가. 아무도 뭘 어떻게 해야할지 가르쳐주지 않았고 나에겐 사수가 없었다. 동기들, 선배들의 호의를 기대하고 이곳저곳에 빌붙다가 실망하기를 거듭했다. 다른 팀으로 간 전임자는 잘못 알려주거나, 자신도 잘 모른다고 하는 일이 많았다. 부장님은 업무 지시를 하고 그 업무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주지 않고, 나는 뭘 잘 모르니까 실수하고 민폐끼치고 혼나게 되는 일도 많았다. 살면서 혼나본 적이 별로 없었어서 더욱 멘붕이었다.

그렇게 몇 달 끙끙거리다보니 번아웃이 오게 되었다. 나는 무기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장기적 목표를 세워본 적이 없었고, 그저 밥을 굶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래서 이제 굶지 않아도 되는데, 여기서 내가 뭘 더 열심히 해야하지? 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열심히, 또는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들은 무슨 이유가 있길래 같은 월급쟁이인데도 열심히 하는거지? 라고 생각했다.

집중력이 떨어졌다. 글을 읽기가 어려웠고, 서류를 보기가 힘들었다. 숫자를 정리하면서 먹고사는 직업인데 숫자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처럼 글을 쓰는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네이버 웹소설조차 끝까지 읽는게 힘이 들었다. 대부분 단문으로 쓰여져서 예전엔 머리를 비우려고 읽던 웹소설이었는데. 업무 때문에 꼭 읽어야 하는 보고서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고 필사해서 겨우 내용을 숙지했다. 계속 뭔가를 깜빡하고 실수하길 반복했다. 명석하고 똑똑한 나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어느새 바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번아웃에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연 15개의 연차휴가로 충분할리가 없었다.

2주 이상 우울감이 지속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게 좋다고 하던데, 나는 두 달간 무기력함이 지속되어서 정신과를 찾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불안에 대한 병식은 없지만) 처방받아서 두 달간 꼬박꼬박 먹었더니 다행히 기분이 좋아지고 지금처럼 일기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예전처럼 명석하고 똑똑하고 이해력 높은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집중력이 조금은 생겼다! 

번아웃을 겪었던 걸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기록해 본다. 몇년 전, 처음 우울증에 걸렸을땐 완전히 낫기까지 일년 반이 걸렸다. 이번엔 두 달만에 상당히 호전되었다. 치료를 시작하기로 결정한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아직 완전히 좋아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지만 그래도 무사히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다. 처음 만났던 심리상담사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몸이나 마음이 아픈 건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아파지면 나을 때까지 약을 먹으면 되고. 좋아졌다가 다시 아프게 되면 또 약을 먹으면 된다고, 그러면 나을 수 있는 거니까 아프게 되는 것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말을 떠올리면서 걱정은 한켠에 접어 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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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19. 12. 7. 22:26

머리를 자를 때 생겼던 일

 

머리를 짧게 잘랐다. 머리를 잘라본 경험은 많지만, 이렇게까지 피곤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머리를 자르러 가기 전, 나는 근처에 있는 미용실 중 남성 커트비와 여성 커트비가 같은 곳을 찾아보았다. 여성 커트비가 이유 없이 더 높다는 기사에 달렸던, 자기는 그런 곳 본 적 없단 댓글이 무색하게도,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수많은 미용실 중 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여성 커트비가 3천원에서 5천원정도 높았다. 어쨌든 나는 두 군데 중 더 비싸고 후기도 좋은 곳으로 갔다. 비싸지만 돈을 더 받아도 거기서 머리를 자를 것이라는 후기가 여러 개 있어서 마음이 홀랑 넘어갔었다.

 

여남 커트비가 같은 곳이라면 왠지 미용사도 젠더 감수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왜 그런 쓸데없는 노력을 했는가.. 긴 생머리에 C컬을 넣는 게 더 좋겠다고 하는 미용사의 말에 나는 숏컷을 할 것이라 했고, 미용사는 "남자친구가 허락해 줬어요?" 라고 물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싸우고 싶진 않았다. 싸웠다가 미용사가 내 머리를 이상하게 잘라놓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래서 "허락이 필요한 문제는 아니니까요^^" 라고 대답했다. 돌이켜봐도 잘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네/아니오를 묻는 질문에 제 3의 선택지로 답하는 것이 굉장히 페미니스트다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치만 "남자들은 보통 머리 긴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라는 말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가요 하하.. 라고 했는데 뭐라고 답을 하는게 좋았을까 싶다. 저는 짧은 머리가 좋은걸요. 정도로 이야기할걸 그랬나. 왜 숏컷을 하기로 했냐고도 물어봐서, 새벽에 출근하니 머리 감고 말리는 시간이 길어서라고 대답했다.

 

미용사분은 빻은 이야기를 좀 하긴 했지만, 앞머리를 만들지 말지 모르겠다는 나의 말에 "제가 알아서 해드릴게요." 라고 했을 땐 신뢰도가 확 올라갔다. 그 말을 하고 나서부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는데, 행여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나는 말을 걸지 않았고, 그분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머리를 다 잘라갈 때 미용사는 나에게 염색이나 펌은 안하시냐고 했다. 나는 일 끝나고 와서 운동하고 씻고 나면 잘 시간인데 염색이나 펌은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아보니 나의 검은 머리가 가장 잘 어울리니까 염색하지 말라고 했다고도 말했다. 이어진 미용사의 말이 충격이었는데, "염색을 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안그래도 숏컷해서 무서운데 검은 머리면 더 무서워요." 난 그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어쨌든 커트가 끝이나고 결제를 하고 미용실을 나섰다.

 

다음에 또 오라며 명함을 주셨지만 그 미용실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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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18. 8. 28. 23:32

다이어트를 그만둔 이유


작년 9월쯤이었던가. 나는 맥도날드에서 빅맥 세트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감자튀김이 맛이 없었다. 그때 난 다이어트를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먹는 걸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릴 때부터 단 한 번도 날씬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 2차 성징을 겪으며 보통 체형 정도가 되긴 했지만, 그때도 나는 스스로가 살쪘다 생각했었고, 그 잠깐의 뚱뚱하지 않았던 순간조차도 고입 대비와 끊임없는 야식 때문에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그렇지만 맘 편히 먹는 것은 어려웠다. 가족과 식사를 할 땐 엄마가 그만 먹으라 하고 오빠새끼가 뚱뚱하다 놀린대도 마음 편히 먹었지만, 급식을 먹을 땐 다른 친구들에 비해 많이 먹는 게, 내가 뚱뚱한 원인을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것 같아서 애써 식욕을 참고 먹을 것을 남기곤 했다. 아무래도 급식은 식판에 1인분 정량을 배식받으니 먹는 양이 정확히 비교되어 괜히 마음이 더 불편했던 것 같다.


몸을 망치는 다이어트 이후 나는 헬스장에서 퍼스널 트레이닝(PT)을 받았다. 그때 트레이너에게 식단 조절 방법을 배웠다. 다이어트식은 탄수화물(밥, 고구마 등)+단백질(고기, 두부, 생선, 달걀)+야채 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PT를 받으며 나는 내가 먹는 모든 것을 사진 찍어 그때그때 트레이너에게 카톡으로 보내야 했다. 2개월 뒤, 나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게 되어 잠시 다이어트를 쉬었다. 쉬는 기간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했었다.


작년 여름방학 때, 딱히 뾰족한 계기는 없었지만 나는 다시 한번 본격적인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 사 먹는 것 이외의 외식은 일주일에 한 번, 그 외엔 집에서 닭가슴살과 야채, 현미밥을 먹었다. 나는 야채 종류, 특히 토마토, 파프리카 같은 걸 싫어해서 그나마 먹을 만한 야채는 양상추, 양배추, 상추 정도였다. (PT를 받을 당시 트레이너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굳이 토마토 같은 걸 먹을 필요는 없다고 했었다) 거기다 드레싱을 잔뜩 뿌려 먹었다. 그래야 먹을 만하니까. 이 정도도 못 하는 다이어트를 하면서 나 자신을 혹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끼니 시간 즈음 이외엔 배가 고프진 않았다. 굶지 않고 잘 챙겨 먹었으니까. 엄격하지만 혹독하진 않았다. 69kg이 되면 두끼떡볶이에 가서 떡볶이를 잔뜩 먹겠다는 생각을 하며 버텼다. 내 자제력이 얼마나 놀라웠냐면, 작년 8월 한국여성학회 캠프에서 야식으로 피자가 나왔는데도 입도 대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엔 참았던 거였지만 식이조절을 하고, 운동하러 가는 건 점차 습관이 되어갔다.


그렇게 나는 점점 살이 빠졌다. 극적으로 살이 빠지진 않았지만 다이어트 기간이 길어지니 옷 사이즈가 줄어갔다. 나는 닭가슴살의 촉촉함을 느끼고 있었고, 양상추에 뿌리는 드레싱도 점점 양이 적어지고 있었다. 라면 먹는 게 더 이상 좋지 않았고 자주 가던 떡볶이집의 떡볶이가 자극적이라 느껴졌다. 내 체형도, 입맛도 변해갔다.


내가 좋아하는 건 그런거였다. 고기, 기름진 것, 크림, 치즈, 버터, 하얀 음식들...빵과 면, 떡... 다이어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음식들이 나는 좋았다. 다이어트 음식을 먹는 건, 어쩔 수 없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의 부역자인 내가, '뚱뚱해도 괜찮아! 내 몸이 들어가는 옷을 옷가게에서 살 수 없는 건 패션 산업의 잘못이야!' 하고 소리치는 내면의 페미니스트를 달래가며 빻은 사회와 타협하는 과정이었다.


입맛이 변하는 건, 나를 잊어가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먹는게 즐겁지 않았다. 그러다 오랜만에 맥도날드에서 감자튀김을 먹었다. 짜고 맛없었다. 그 때 충격을 받았다. 맥도날드 감자튀김이 너무 좋아서 항상 햄버거 단품이나 콤보가 아닌, 세트 메뉴를 시키던 나였는데. 혼란이 왔다. 타협이고 절제일 뿐이라 생각했던 것이 나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난 다이어트를 관두고 그냥 맛있는 거 먹으면서 나름대로 몸과 마음의 건강을 관리하며 살고 있다. 어쩌면 '69kg 이 되면 두끼떡볶이에 가야지'하고 다짐했던 때가 아득할 정도로, 지금은 객관적으로 뚱뚱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타협' 없이, 망설임 없이 엄격한 다이어트를 그만둘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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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18. 6. 19. 00:18

왜 내 겨털은 햄보칼 수가 엄써!!!!!


효리네 민박을 정주행 하면서, 다소 뻣뻣했던 아이유가 효리 언니를 따라 열심히 요가를 배우고 나니 유연해진 것을 보고 한 뻣뻣 하는 나도 열심히 하면 유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 근처 요가원에 등록했다.


요가를 할 때 따로 정해진 복장은 없지만, 몸을 마구 뒤집어 버리는 동작을 할 때 옷이 말려올라가거나 하면 신경이 쓰여서 동작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몸에 딱 붙는 상의와 하의를 입는 게 좋다고 했다. 나에겐 운동할 때 입는 레깅스는 있지만 작년의 다이어트 때문에 갖고 있던 상의는 모두 헐렁해져서 딱 붙는 상의는 검은색 민소매 셔츠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제모를 안 한 지 좀 시간이 지나서 반 정도 털이 성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의 털들은 색도 진하고 숱도 많고 곱슬거려서 다른 사람들의 털보다 훨씬 존재감이 크다...! 그래서 일단 첫날엔 민소매 티를 입고 위에 헐렁한 반팔 티를 입고 갔다. 가서 눈치를 좀 보고 민소매를 입을지 말지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처음으로 요가 수업을 받은 날, 나는 내가 가진 최대한의 눈치를 발휘해서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요가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대부분 반팔을 입고 있었다. 민소매를 입은 사람은 딱 한 명 있었고, 그 사람의 겨드랑이는 정말 털 하나 없이 깨끗했다. 자신이 없어져 버렸다.


그날 밤, 집에 와서 또 한번 고민했다. 밤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모를 하고 내일 민소매를 입을까? 그치만 지금까지 털을 기른 게 아깝다.

그래도 털을 마구 달아놓은 채로 팔을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요가 동작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러면 제모를 하지 말고 겨털이 잘 안 보이게 탈색을 할까? 하지만 그러면 같은 숱의 겨털이라도 덜 풍성해 보이지 않을 것 같고 그건 왠지 자존심이 좀 상하는데..

그냥 깨끗하게 제모를 할까? 하다가, 왁스 스트립으로 겨털을 뽑아낼 때의 고통이 상기되었다. 왁싱할 때 핏방울이 맺히는 건 예사인데. (면도기로 겨털을 밀면 깨끗하게 제모가 되지도 않을 뿐더러 다시 날 때 따갑다. 나는 예전에 잦은 면도로 피부가 상해서 피부과에 간 적도 있었다.) 나는 아픈 걸 잘 참지만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니까. 아, 참으로 어렵다.


왜 내 겨털은 햄보칼수가업서!!!



왜 나는 자신있게 제모를 끊을 수 없을까. 심지어 요가 수업은 다들 자기 운동 하느라 힘들어서 남 신경쓸 시간도 없고, 같이 수업 듣는 사람들은 전부 여성이었는데. 그래서 다들 여자의 겨드랑이에 털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자연스럽다는 걸 알고 있을텐데. 제모를 안 해도 되는 천혜의 환경 아닌가. 그런데도 제모 없이는 민소매를 못 입는 내가 미웠다. 내 겨드랑이도 날 미워하겠지.




밤새 고민 후 다음날 나는 요가원에 반팔티를 입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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