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에 런던 퀴퍼가 있었으니, 다녀온 지도 벌써 2달이 지났다. 늦은 후기인 듯하지만 나혜석이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약 4년 뒤에 여행기를 썼던 걸 생각하며 지금도 늦지 않은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17년부터던가? 그때부터 서울 퀴어문화축제에 매년 갔기에, 올해는 영국 여행 때문에 가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서울 퀴퍼 날짜가 확정되기 전 런던행 비행기표를 예매했으니까. 여행을 준비하며 문득, 그렇다면 런던에서는 퀴어 퍼레이드를 언제 하는지 궁금해졌고, 구글에 'London Queer Parade(런던 퀴어 퍼레이드)'를 검색했다. 바로 공식 홈페이지가 나왔다. 놀랍게도 서울과 같은 7월 1일이었다!
사실 대학생 때는 서울 퀴퍼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던 게, 보통 6월 마지막주엔 1학기 기말고사가 있는데 퀴퍼는 항상 시험 직전 주말에 열렸었다. 주로 벼락치기로 시험을 보는 나에게, 시험 직전 주말은 하루도 날릴 수 없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퀴어 퍼레이드의 계기가 된 사건인 스톤월 항쟁이 1969년 6월에 일어나서 그때 행사를 하는 것이므로, 왜 하필 시험 기간에 하냐고 툴툴거리기도 어려웠다.
시험기간 덕분에 퀴퍼는 6월에 하는 거라고 기억하게 되었는데, 7월에 런던에서 퀴퍼를 한다니! (비록 애매한 7월인, 7월 1일이지만) 생애 최초로 해외 퀴퍼에 갈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런던 여행에서 토트넘홋스퍼 구장 투어, 해리포터 스튜디오, 뮤지컬 등등 재미있는 이벤트를 많이 계획했지만, 퀴퍼는 예상치 못했던 이벤트였다.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행진 경로가 나와 있었다. 시청 광장에 모인 누구라도 행진에 참여할 수 있는 서울 퀴어 퍼레이드와는 다르게, 런던의 퀴어 퍼레이드는 사전 신청을 해야 행렬에 낄 수 있었다. 3만 명에서 4만 명 정도가 행진을 하는데, 행진 경로 가장자리에 서서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런던 시내 곳곳에 테마별로 6개의 무대행사가 있었고, 메인무대인 트라팔가 스퀘어에서는 디즈니 영화 <겨울왕국>에서 엘사 역할을 했던 가수인 이디나 멘젤의 무대가 진행된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행진의 시작에는, 늘 그렇듯이 런던 시장이 선두에 선다고 했다. 한국의 오세훈 서울시장은 장소 대관을 막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리고 런던에서는 '퀴어 퍼레이드' 보다는 '런던 프라이드' 혹은 '프라이드 인 런던'이라는 단어를 더 흔하게 쓰는 것 같았다.
런던 프라이드는 이번 런던 여행의 5일 차 일정이었는데, 런던에 도착했을 때부터 거리 곳곳에 무지개가 걸려있었다. 음식점, 회사, 교회는 창문에 퀴어 프라이드 플래그 테이핑을 하거나, 문 앞에 깃발을 걸어놓고, 길거리 가판대와 타바코샵에서는 무지개 깃발과 모자 같은 아이템을 팔았다.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땐, 거리 곳곳이 무지개인 것이 신기해서 발견할 때마다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는데, 며칠 지나니 흔하게 보이는 퀴어 플래그에 조금은 시큰둥해졌다.
사실 런던 프라이드 행사 하루 전날, 정보를 알아보다가 22년 행사 참석자는 1.5 million(150만 명)이었단 걸 보고 잠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민족정론지 보도를 보면 23년에도 비슷한 수의 인파가 모였던 것 같다. 겨울 비수기의 런던을 떠올리며 비행기 티켓을 끊었던 나는 런던 시내의 끝없는 인파에 지친 상태였지만, 쉬고 싶단 마음을 힘겹게 떨치고 호텔 문을 나섰다. 메인 스테이지인 트라팔가 광장까지는 숙소에서 금방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서, 차량 통제된 도로를 걸어 행진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았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유의 '홀씨' 공개에 부쳐. (0) | 2024.02.16 |
---|---|
2023 런던 퀴어 퍼레이드-③/그래도 다음번엔 겨울에 가야지 (1) | 2023.09.17 |
2023 런던 퀴어 퍼레이드-①/프롤로그 (0) | 2023.09.09 |
그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이유 (0) | 2022.08.14 |
숨막히는 건강의 늪 (0) | 2021.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