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을 알게 된 이후, 일상에서 고찰할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었다. 많은 것들이 새로웠다. 몇 년 전까지는 그런 새로운 발견을 정리해서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올리곤 했었다. 여러 사람이 관심을 주고,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었다. 외부 매체에 기고하는 것은 더욱 즐거웠다.
하지만 요즘은 영 업로드를 하지 못했는데, 글을 쓰지 못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절대적인 시간 부족이었다. 블로그에 자주 글을 쓰던 시기는 대학을 휴학 중일 때라 정말 남는 게 시간이었다. 지금은 퇴근하고 나서 잠시 쉬다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운동을 하고 오면 이내 잘 시간이 된다. 그 사이에는 무언가를 작성할 시간도, 작성을 위해 사유할 시간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공부도, 고민도, 생각도 거의 하지 않다보니 지적 능력이 많이 떨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회사 동료들과 이야기해보면 이것은 나만 겪는 현상이 아니었다. 심하게 말하면 "지적 능력을 팔아 돈을 번다"고 얘기할 정도로, 직장에서의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나의 지성이 사라져갔다. 정신병도 지적 능력을 퇴화시키는데 한몫했고, 애석하게도 정신병이 앗아간 총명함은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떨어졌구나' 인지한 다음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노력을 통해 조금씩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 직장에서 기술 문서를 작성해야 할 땐 속으로 오열하며 한 자 한 자 작성했었는데, 다행히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건 불가능했으나, 꾸준한 치료와 개인적 노력으로 트위터 이상의 긴 글을 쓰는 것도 어려웠던 상태는 이제 벗어났다.
글을 쓰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내보일만한 글감이 없어서였다. 대학생 때야 방학하고, 시험도 보고, 이런저런 활동을 시도해보기도 했는데 직장인의 삶이란, 아무리 들여다봐도 새로운 구석을 찾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쓰자니 내가 특정될까 두려웠다. 정치 평론을 하기에도 내가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았고, 여러 사람이 하는 이런저런 말들에 내가 한마디 더 얹어야 하나 싶었다. 그리고 나의 가치관에 비추어보았을 때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여 적을 만들고 싶지 않은 비겁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강제성이 없는 자발적 글쓰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이제 트윗 이상 길이의 글을 쓸 수 있는 정신 상태는 만들었으니 퇴사 후 발간될지도 모르는 퇴사 에세이의 소재는 종종 기록해놓을 예정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일기장에 주로 기록할 것이고, 그런 내용을 공개적으로 발행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앞으로 이 블로그에 글이 올라오게 될지도 불투명하다. 퇴사를 언급하였으나, 지금 당장은 퇴사할 생각도 없고 우리 회사가 조금은 좋다. 정년은 언젠가 다가오니까 그때쯤 모아왔던 썰을 방출하게 될지도.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3 런던 퀴어 퍼레이드-②/어쩌다 프라이드! (0) | 2023.09.10 |
---|---|
2023 런던 퀴어 퍼레이드-①/프롤로그 (0) | 2023.09.09 |
숨막히는 건강의 늪 (0) | 2021.04.03 |
번아웃의 모습 (0) | 2020.11.23 |
머리를 자를 때 생겼던 일 (0) | 2019.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