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2023. 9. 17. 00:53

런던 퀴어 퍼레이드가 있던 날, 최고 기온은 24℃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날씨와 비슷했다. 런던은 걸핏하면 비가 오기로 유명하지만, 이날은 아침 일찍 잠깐 비가 내리고 그쳤다. 영국은 서안 해양성 기후라서, 여름이지만 건조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화창하고 맑은 하늘, 시원한 바람, 그리고 무지갯빛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사람들은 예술적이었다... 사람들이 밀집된 곳에 있다 보니 옆에 있는 사람들과 팔뚝 살이 접촉될 때가 있었는데, 시원하고 건조한 날씨라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런던 퀴어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 하얀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이고, 빨주노초파남보 비행기가 등에 그려진 검은 티셔츠를 입은 작성자가 중앙 하단에 서있다.관중 속의 작성자가 무지개 배경색에
퍼레이드를 기다리며 슬로건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가리고 게시할지 고민했는데, 이름 모르는 외국 사이트에 게시되는 건 조금 불쾌할지도 모르겠어서 가까이 나온 얼굴은 블러 처리했다)

트라팔가 광장 앞 길가에서 잠깐 기다리니 퍼레이드가 트라팔가 광장 앞으로 지나갔다. 행진 경로 옆에 가득 있던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고, 다들 즐거워했다. 여러 단체와 기업의 트럭을 따라 소속된 사람들이 행진을 이어갔다. 각자 만든 피켓이나 현수막을 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푸른 하늘 아래, 퀴퍼 참여 단체의 트럭이 지나간다. 많은 관중이 맞아주고 있다.푸른 하늘 아래, 퀴퍼 참여 단체의 트럭이 지나간다. 많은 관중이 맞아주고 있다.
푸른 하늘 아래, 퀴퍼 참여 단체의 트럭이 지나간다. 많은 관중이 맞아주고 있다. 무지개 깃발이 많이 보이고,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사람들도 있다.푸른 하늘 아래, 퀴퍼 참여 기업인 United Airlines의 트럭이 지나간다. 많은 관중이 맞아주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관중도 있다.
프라이드 행진이 지나가고, 길가에 서있던 많은 관중은 환호했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버로우마켓에 가려고, 행진이 다 지나가기 전에 자리를 벗어났다. 템즈강을 따라 걸어가는 길은 내내 축제 분위기였다. 음악이 들려왔고, 무지개 옷을 입고 페이스 페인팅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Protect Queer Children'라는 문구가 무지개 깃발 밑에 쓰여 있는 모양의 남색 티셔츠를 입고 가던 할아버지들이 인상 깊었다. 다이소에서 산 비눗방울 기계를 목에 걸고(어릴 적 간절히 원했던 사치를 이제는 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5천원 주고 구입했다.) 비눗방울을 뿌리며 걷고 있었는데 얼굴에 트랜스젠더 플래그를 그리고 분홍 티셔츠를 입은 분이 극 F스럽게 "오마이갓! 쏘 뷰티풀!" 하고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눈이 마주치면 "Happy Pride!"하고 인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분이 좋았고 재미있었지만, 사실은 내향인으로서 기가 조금씩 빨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트라팔가 광장 근처를 걷던 도중에, 누군가가 나에게 팸플릿을 줬다. 한국에서 집회에 가면, 종종 관련된 의제에 대해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들이 있기에(가령 기후 정의 집회에서 습지 매립 반대 전단지를 나눠준다든지) 그런 건 줄 알고 "Thank you."라고 말하면서 받았다. 그런데 팸플릿 앞면엔 Jesus 어쩌고저쩌고가 적혀있고, 별로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팸플릿을 나눠준 사람을 보니 TPO에 맞지 않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혐오 세력이었던 것이다...

무지개 옷을 입거나 깃발을 든 사람들 사이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둘 보인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빨간 화살표로 표시해 두었다.
런던 퀴퍼의 혐오 세력은 개별적으로 움직인다.

즐겁고 신나고 기 빨리는 런던 퀴어 퍼레이드가 끝나고, 나처럼 런던 퀴퍼에 참석한 한국인이 있는지 네이버 블로그 검색을 해보니, 행사 당일에 후기를 올린 부지런한 사람이 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여자분이 쓴 것 같았는데, 런던에서 우연히 퀴퍼를 보게 되었는데 특이해서 찾아보았더니 한국에서도 매년 한다더라, 그런데 런던에서도 퀴퍼 반대한다며 설교하는 목사가 있었고, 한국에서도 반대 집회를 하는 걸 보면 세계 어디든 사람들 정서가 비슷한가보다, 하는 글이었다. 나는 그 말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다. 런던 퀴퍼에도 혐오 세력이 있긴 했으나, 한국 개신교에서 반대 집회를 진행하는 데 비해, 런던의 혐오 세력은 조직화되어있지 않았고 한 명씩 전단지를 나눠주거나 행렬에 욕을 하거나 그런 식이었다. 런던 도시 전체에서 프라이드 플래그를 찾을 수 있었고, 대로 위에 프라이드 플래그를 걸어놓은 곳도 있었다. 지자체 협조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로 위에 만국기처럼 퀴어 프라이드 플래그가 걸려있다.
런던 중심지 도로에 퀴어 프라이드 플래그가 걸려있다.

지하철에 있는 런던 프라이드 안내 광고는 시장 명의로 되어있었고, 런던 시장은 늘 퀴어 퍼레이드의 선두에서 행진한다. 혐오 세력과의 충돌이 염려되지 않으니, 행사에 배치된 경찰의 수도 비교적 적었고, 경찰분들은 어깨에 무지개 견장을 달고 있었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듯, 런던의 성소수자들도 나름의 차별과 억압을 겪고 있겠지만, 적어도 프라이드 주간에 내가 여행자로서 겪은 것은 런던은 성소수자를 환대하는 곳이었다. 서울과는 다르게.

왜 런던과 서울은 이렇게 다를지 궁금했다. 몇십 년 전엔 국경을 오가기도 쉽지 않고 나라마다 발전 속도가 달랐겠지만, 지금은 비행기로 갈 수 있고 세계 시민이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한국도 영국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인데 무엇이 퀴어 퍼레이드 풍경을 이렇게 다르게 만들었을까?

그날 밤엔 숙소 창가에 서서,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런던 아이를 보며 레드 와인을 마셨다. 런던 아이는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그것에 맞춰서 조명을 바꾼다고 한다. 북적이는 외향적 파티가 끝나고 찾아온, 달고 소중하고 조용한 시간이었다. 다음에는 꼭 겨울에 런던 여행을 해야지.

창틀에 레드와인 한병과 버터 비어 컵 두개가 놓여있다. 어두운 밤 창문 뒤로 무지갯빛 런던 아이가 보인다.
무지개 런던 아이를 보며 해리 포터 스튜디오에서 버터 비어를 마시고 가져온 컵에 레드 와인을 마셨다.

 

무지개색으로 돌아가는 런던 아이

 

Posted by 퍼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