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자타공인 '주당'이었다. 지금 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싶고, 쉽사리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술이 좋았던 이유를 떠올려보면 가장 큰 이유는 잠을 쉽게 잘 수 있게 해줘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저속노화'가 일종의 트렌드가 된 지금은 다를까 기대해보지만,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때까지는 다들 잠은 죽어서 자는 거라는 말을 많이 했었다. 선생님들은 '사당오락(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은 옛말이고, 요즘은 '삼당사락'이라고 했다. 나는 공부는 잘 안했지만 잠을 자면 안된다는 말만큼은 착실히 들었던 것 같다. 밤에 잠을 잘 못자니 낮에는 걸핏하면 졸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 밤에 잠드는 것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살아왔다.
대학생이 되고부터는 술을 마시는 것이 사회적으로 허용되었고, 술을 많이 마시면 눕자마자 잘 수 있었다. 그땐 왠지 숙취란 것도 별로 없어서 ,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쓰러지듯 잠드는 것을 즐겼다. 아마도 알콜 중독이 아니었을까 싶다.
취업하고 나서는 회식이라는 명목으로, 회사 돈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자리가 많아졌다. 그리고 사람들의 주사를 보는 것이 괴로웠다. 했던 말을 또 한다거나,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것들. 나는 내가 그럴까봐 회식 때 술을 마시면서도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데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취하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사실은 주당으로서의 삶이 좋았던 것이, 웬만한 남성들보다 많은 술을 마실 수 있는 내가, '여자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라는 사회적 편견을 깨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짧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사회적 편견은 공고하고,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그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을 본다면, 편견을 깨기보다는 그저 그 사람을 예외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고 끝내기 때문이다. 결국 술을 마시는 건 편견을 깨지도 못하면서 내 건강만 해치는 행위였다.
재작년부터는 월 1회 이상은 술을 마시지 않았고, 웬만해선 한 잔 정도로 끝냈다. 그래서인지 20대 초반에 자주 겪었던 갑작스런 속쓰림, 소화불량과 브레인포그 같은 것들을 겪지 않고 있다. 객관적으로 남들과 비교하면 약한 체력이지만, 살면서 최고로 체력이 좋다. 정신도 맑아져서 대학 공부를 다시 하면 더 쉬울 거 같은 느낌이다.(그렇다고 대학생 때로 절대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비싼 술을 좋아했었기 때문에 이제는 돈도 많이 아끼고 있다. 주당 시절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의아했지만, 지금은 왜 진작에 술을 끊지 않았는지 후회할 정도다.
그리고 어제 숙취로 고생하면서 한번 더 깨달았다. 역시 술은 백해무익하고 마시지 않는 것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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