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정도까지 나는 내가 예민한 편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아마도 내가 좋아해서 가까이하는 친구들과 애인이 나보다도 예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예민하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예민한 편이라는 걸 자각하게 된 터닝포인트 같은 것은 없었지만, 굳이 계기를 찾아보자면 "신경쓰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때 같이 일했던 상사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었고, 굉장히 권위주의적이었다. 나보다 10년 정도 일찍 입사한 선배는 옛날엔 그분이 후배를 때리는 분이었다고 이야기해줬다. 하지만 나는 딸 같아서 제법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상사는 면담을 할 때마다 네가 잘하는 게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며, 직접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옆 부서의 박과장이나 강대리는 씩씩하게 알아서 일을 잘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몇 달 뒤에 박과장님과 점심을 먹게 되었고, 나는 상사가 그런 말을 했는데 어떻게 하면 박과장님처럼 될 수 있을지 물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상사가 ㅇㅇ사원(나)은 딱히 뭘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잘 하는데 박과장은 왜 그렇게 못하냐고 했다고 말씀해주셨다. 순간 어이도 없었고, 이간질 시키려 한건가 싶어서 조금 화가 났다. 박과장님은 내가 기분 나빠하는 걸 보며 "신경쓰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유감이지만 나는 "신경쓰지 말라"는 말이 타인의 감정을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감정 표현을 자제하라는 뜻으로 하는 종종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박과장님은 무던하고 나는 예민하다는 것을 그 순간에 알아차리게 되었다. 몇 명 없는 여성 직원 중 한 분이지만, 박 과장님과도 그닥 코드가 맞지 않을 수 있겠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그 후에, 내가 사실은 남들보다 예민한 편인 것 같다고 애인님과 다른 친구 1명에게 이야기했는데 그걸 아직까지 모르고 살았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 빼고는 다 알고 있었던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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