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2018. 5. 14.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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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연대기> 후기-①/영화의 주요 내용과는 상관없을 것 같은 단상들

<피의 연대기> 후기-②/생리대는 휴지와 같다


<피의 연대기> 후기-③/생리와 자본주의


<피의 연대기>를 보며, 너무 분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던 부분이 있었다. 저소득층 여학생들이 생리대 살 돈이 없어 깔창을 생리대로 쓰거나, 생리 기간이 되면 수건을 깔고 누워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내용이 다큐멘터리에 나왔다. 2016년에 여러 번 보도되었고,(기사) 이후 여러 복지 정책이 시행되고 기부 및 펀딩이 있었지만 여전히 생리대는 누군가에겐 비싸다. 나의 생리 경험과 영화를 곱씹어보면 돈이 없을수록 생리에 더 큰 돈을 들이거나, 더 불편해야만 하는 모순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생리대를 직접 사본 건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그 전까지는 엄마와 함께 마트에 가서 생리대를 샀었으니까. 당시엔 소셜커머스에서 한 학기 정도 쓸 분량의 생리대를 한 번에 사서 썼었다. 그게 단가로 따졌을 때 가장 저렴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래서 생리대 가격 인하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소셜커머스에서 사면, 생리대를 싸게 살 수 있는데 왜 생리대 가격을 인하해야 하는 걸까? 하고 엄마한테 물었을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너 고등학생 때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니?"

그랬다. 소셜커머스에서 대량으로 생리대를 구매해 비용을 아낄 수 있었던 건, 대학생이 되어서 시간 여유가 늘었기 때문에 최저가 검색을 할 수 있고, 용돈이 늘어 한 번에 결제할 수 있는 금액이 커져서 가능한 거였다.


2년 전부터 나는 탐폰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국산 탐폰을 썼고, 생리대를 쓰다 탐폰을 쓰니 완전 신세계였다. 냄새도 안나고 살이 짓무르는 일도 없었다. 생리혈이 새서 옷에 묻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생리대보다 좀 더 자주 갈아야 하고, 소셜 커머스에서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없어서 돈이 더 들었다. 몇 달간 한국산 탐폰을 쓰다가 플레이텍스 탐폰이 훨씬 좋단 말에, 탐폰을 직구하기 시작했다. 원래 옛날엔 우리 나라에서도 플레이텍스 탐폰을 살 수 있었지만 몇 년 전에 철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탐폰을 거의 안쓰긴 하니까... 아무튼 아마존에서 플레이텍스 탐폰을 직구하면 아주 싼 가격에 많은 탐폰을 살 수 있었다. 다만 배송비가 비싸니까 많이 시켜야하는 단점이 있고.. 나는 한 번 살 때 5만원 정도를 사서 거의 1년 넘게 썼던 것 같다. 아무튼 플레이텍스 탐폰과 한국 탐폰의 편리함은 정말 천지차이였고 나는 절대로 고통스러운 한국 탐폰을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생리컵에 완벽하게 적응해서 남은 탐폰을 이곳저곳에 나눠줬고, 나는 더이상 생리 때문에 돈을 쓰지 않는다. 나는 골든 컵을 찾기까지 10만원 정도를 소비했다. 보통 생리컵 하나가 4~5만원 가량인 것을 생각하면 두 번째 만에 적응한 것이니 시행착오를 많이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청소년이나 저소득층에게는 부담스러운 돈일 테고, 성인 중에도 해외 직구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생리컵을 이용해서 편리하고 저렴한 생리를 할 수 있는 것 역시 나의 특권이었던 것이다.


10대부터 50대까지, 여성들은 생리를 한다. 생리를 한다는 사실은 평등하지만 여성 개개인은 평등하지 않다. 자본 계급과 정보 접근성에서 차이가 난다. 그래서 생리 역시 자본주의적 계급에 따라 계급이 나뉘게 된다. 이런 부조리함이 나는 너무도 분했다.

Posted by 퍼포린
아주짧은글2018. 1. 20. 16:18

백인 미국인은 한국인을 어떻게 볼까?(기사 본문 링크)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고 방식과 행동이 아무 맥락없이 짠 하고 생성되기 보다 많은 부분이 사회의 합의/규범의 안에서 생성된다. 적당한 규범이 성립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눈치 보다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따라한다’가 많은 사람들의 행동 규칙이다. 예컨대 방에서 ‘불’이 나도 혼자인 경우에는 본능을 따라 바로 도망가지만, 여러 사람들이 존재하게 되면 어떻게 할지 서로 눈치부터 본다. 그러다가 결국 혼자일 때보다 대피가 늦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


어떤 경우에라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혹은 모두가 YES 또는 NO 라고 할 때 혼자 반대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드물다. 이렇게 행동 규범을 외주하는 인간으로서 차별주의자들 (및 차별에 대해 평소 별 다른 생각이 없던 사람들)의 경우 자신과 같은 차별주의자, 또는 적어도 차별을 방관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메시지는 이제부터는 ‘차별해도 된다’는 허용이다. 이미 가지고 있던 차별과 생각 없음을 꺼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차별을 밖으로 휘두르는 것과 그러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오랜만에 과학 동아 기사를 찾아 읽었다. (아주 좋은 기사였다!)

"행동 규범을 외주하는 인간으로서 차별주의자" 를 아주 한심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스스로 생각이란 걸 못하니 본인이 타자로 존재하는 집단에서 차별을 당함으로써 그들이 강제(타의) 역지사지 해보길 바랐다. 그렇지만 나도 행동 규범을 외주하고 있지 않나. 페미니스트이고 다른 여러 소수자들의 인권 운동에 연대하기로 결정했지만, 그 결정 역시도 인권 감수성을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게 한 주변 환경 덕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그럼 이것은 외주가 아닌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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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