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2023. 9. 10. 01:26

7월 1일에 런던 퀴퍼가 있었으니, 다녀온 지도 벌써 2달이 지났다. 늦은 후기인 듯하지만 나혜석이 유럽 여행을 다녀온 후 약 4년 뒤에 여행기를 썼던 걸 생각하며 지금도 늦지 않은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17년부터던가? 그때부터 서울 퀴어문화축제에 매년 갔기에, 올해는 영국 여행 때문에 가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서울 퀴퍼 날짜가 확정되기 전 런던행 비행기표를 예매했으니까. 여행을 준비하며 문득, 그렇다면 런던에서는 퀴어 퍼레이드를 언제 하는지 궁금해졌고, 구글에 'London Queer Parade(런던 퀴어 퍼레이드)'를 검색했다. 바로 공식 홈페이지가 나왔다. 놀랍게도 서울과 같은 7월 1일이었다!

사실 대학생 때는 서울 퀴퍼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던 게, 보통 6월 마지막주엔 1학기 기말고사가 있는데 퀴퍼는 항상 시험 직전 주말에 열렸었다. 주로 벼락치기로 시험을 보는 나에게, 시험 직전 주말은 하루도 날릴 수 없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퀴어 퍼레이드의 계기가 된 사건인 스톤월 항쟁이 1969년 6월에 일어나서 그때 행사를 하는 것이므로, 왜 하필 시험 기간에 하냐고 툴툴거리기도 어려웠다.

시험기간 덕분에 퀴퍼는 6월에 하는 거라고 기억하게 되었는데, 7월에 런던에서 퀴퍼를 한다니! (비록 애매한 7월인, 7월 1일이지만) 생애 최초로 해외 퀴퍼에 갈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런던 여행에서 토트넘홋스퍼 구장 투어, 해리포터 스튜디오, 뮤지컬 등등 재미있는 이벤트를 많이 계획했지만, 퀴퍼는 예상치 못했던 이벤트였다.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행진 경로가 나와 있었다. 시청 광장에 모인 누구라도 행진에 참여할 수 있는 서울 퀴어 퍼레이드와는 다르게, 런던의 퀴어 퍼레이드는 사전 신청을 해야 행렬에 낄 수 있었다. 3만 명에서 4만 명 정도가 행진을 하는데, 행진 경로 가장자리에 서서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런던 시내 곳곳에 테마별로 6개의 무대행사가 있었고, 메인무대인 트라팔가 스퀘어에서는 디즈니 영화 <겨울왕국>에서 엘사 역할을 했던 가수인 이디나 멘젤의 무대가 진행된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행진의 시작에는, 늘 그렇듯이 런던 시장이 선두에 선다고 했다. 한국의 오세훈 서울시장은 장소 대관을 막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리고 런던에서는 '퀴어 퍼레이드' 보다는 '런던 프라이드' 혹은 '프라이드 인 런던'이라는 단어를 더 흔하게 쓰는 것 같았다.

Parade Details
The parade will see around 600 groups made up from LGBT+ Community Groups&#44; LGBT+ businesses&#44; and partners&#44; forming together to make our total over 32&#44;000 participants. As usual&#44; the Mayor of London will be leading the parade!
Applications for groups and organisations to participate in this year&#39;s parade is now closed. If you would like to be a part of the event&#44; join us along the route or at one of the stages (see below)
런던 프라이드 홈페이지에 안내되어 있던 행진 경로
어떤 번화가 길거리에 프라이드 행사 스폰서와 6개의 무대 안내가 있었다.

런던 프라이드는 이번 런던 여행의 5일 차 일정이었는데, 런던에 도착했을 때부터 거리 곳곳에 무지개가 걸려있었다. 음식점, 회사, 교회는 창문에 퀴어 프라이드 플래그 테이핑을 하거나, 문 앞에 깃발을 걸어놓고, 길거리 가판대와 타바코샵에서는 무지개 깃발과 모자 같은 아이템을 팔았다.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땐, 거리 곳곳이 무지개인 것이 신기해서 발견할 때마다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는데, 며칠 지나니 흔하게 보이는 퀴어 플래그에 조금은 시큰둥해졌다.

테스코 익스프레스의 프라이드 플래그 테이핑
King&#39;s Cross Station
Celebrating Pride
킹스크로스역의 프라이드 현수막
무지개색 스테인리스 워터보틀에 토트넘 로고인 축구공 위의 닭이 그려져있음
토트넘홋스퍼 구장에서 사온 프라이드 워터보틀
무지개 퀴어 프라이드 플래그에 &quot;Celebrate With Pride&quot;라 적혀있고&#44; 아래쪽에 다양한 정체성의 프라이드 플래그가 있음
화장품 가게의 깃발 테이핑

 

햄버거 모양 로고가 무지개 및 트랜스젠더 플래그 색으로 되어있음
쉑쉑버거의 프라이드 로고
DANCE WITH PRIDE 라는 글자를 무지개색으로 적어놓은 창문
발레용품점 창문

사실 런던 프라이드 행사 하루 전날, 정보를 알아보다가 22년 행사 참석자는 1.5 million(150만 명)이었단 걸 보고 잠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민족정론지 보도를 보면 23년에도 비슷한 수의 인파가 모였던 것 같다. 겨울 비수기의 런던을 떠올리며 비행기 티켓을 끊었던 나는 런던 시내의 끝없는 인파에 지친 상태였지만, 쉬고 싶단 마음을 힘겹게 떨치고 호텔 문을 나섰다. 메인 스테이지인 트라팔가 광장까지는 숙소에서 금방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서, 차량 통제된 도로를 걸어 행진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았다.

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23. 9. 9. 16:56

4월. 여행 두 달 전이었지만 그래도 유명한 관광지이다 보니 여전히 숙소 선택지는 많았다. 그리고 정말... 정말 비쌌다. 원래 5박 100만 원 정도에 예약하는 게 목표였는데, 그 가격을 만족하는 호텔은 반지하거나 창문이 없거나 런던 중심부에서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멀거나 그랬다. 그래서 예산을 200만 원으로 올렸고... 베드버그가 없는지, 창문이 있는지, 교통이 편리한지(지하철역이 근처에 있는지) 위주로 체크해서 숙소를 골랐다.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관광을 더 많이 할 것이라서 방이 넓진 않아도 괜찮았고, 난 힘이 세기 때문에! 20kg짜리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것도 상관없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숙소 후보는 원헌드레드 호텔과 어셈블리 호텔이었다. 원헌드레드 호텔은 미국에도 있는 호텔 체인인데, 1층에 바가 있다고 했다. 방 디자인도 예뻤고, 그 호텔 체인의 덕후(?) 가 있는 브랜드라고 했다. 어셈블리 호텔은 소호와 코벤트가든 사이에 있었다. 전에 런던 여행을 갔을 때, 소호 The french house에서 London Pride 맥주를 한 잔 했던 기억이 좋았고, 거기가 제일 중심지인 것 같아서,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런던에 다시 온다면 소호에 묵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서 숙소를 어셈블리 호텔로 정했다.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를 일이 없었다.

런던아이 사진빅벤 사진. 왼쪽에 공사장이 보임
숙소 창문으로 보이던 런던아이와 빅벤. 흐린 날씨였다.

원헌드레드 호텔을 숙소로 정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유럽 여행 카페에서 본 댓글 때문이었다. 그 호텔은 쇼디치에 있는 곳이었는데, 런던 중심지인 트라팔가 광장에서 20~30분 정도 걸렸다. 여행 카페에 '쇼디치 숙소'를 검색하니까 , '만약 당신의 외국인 친구가 서울 여행을 온다면 명동에 숙소를 잡으라고 하지, 동작구에 숙소를 잡으라고 하지 않을 거잖아요?'라는 댓글이 있었다. 그 말에 공감되어서 소호의 숙소에 묵기로 결정했는데...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동작구에 숙소 잡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래서 여행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나보다. 자세한 내용은 숙소 후기 편을 쓰게 된다면 그때...

어셈블리 호텔에 대한 리뷰를 검색해 봤는데, 2월에 묵었던 사람들이 1박 10만원대의 저렴한 숙소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 나는 1박에 42만원을 썼는데... 그 숙소를 예약하고, 런던에 가고, 마지막 밤을 보낼 때까지, 숙박비가 비쌌던 이유가 단지 여름 성수기이기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불현듯 깨달았다. 비싼 숙박비는 런던 프라이드(런던 퀴어 퍼레이드) 때문이었다! 나도 여행 일정 중 구경하러 갔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독일에서 옥토버페스트 할 때도, 뮌헨에서 1박에 8유로씩 하던 호스텔이 30유로가 되는 걸 봤었는데.(내가 독일에 갔던 건 약 10년 전이었으니 지금은 더 비싸졌겠지) 여름 성수기인 데다가 축제까지 겹치니까 숙소 비용이 치솟았다.

아마도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런던 프라이드가 제법 감동적이었어서, 후기를 꼭 남기고 공유하고 싶었는데, 퀴퍼 때문에 호텔비가 비쌌던 이야기를 하려고 이만큼이나 써버렸다. 얼른 런던 퀴퍼 후기도 써야지.

길거리 타바코 가판대. 무지개 깃발을 팔고 있다퀴어 플래그로 된 sohoplace 전광판
지하철역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 무지개 깃발을 파는 가판대와 퀴어 플래그 전광판을 볼 수 있었다.

 

Posted by 퍼포린
후기2022. 10. 13. 00:25
다큐멘터리 영화 &lt;성덕&gt; 포스터

수험생 시절, 친구들과 몰래몰래 보던 슈퍼스타K4는 큰 위로였다. 얼른 수시 합격하고 무대를 생방송으로 보고 싶단 마음에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많은 무대 중에서도 단연 우리를 설레게 했던 건, 두 미남의 "먼지가 되어" 무대였다. 경쟁 무대였지만 완벽한 하모니였고, 둘 중 하나는 떨어져야 하는데 심사위원이 '슈퍼패스'를 사용해서 둘다 합격할 수 있었던 감동의 무대였다.

난 무사히 대학에 합격했고 날 빠져들게 했던 그 가수, 정준영의 첫 미니앨범이 나왔다. 슈퍼스타K4에 내가 덕질하던 가수가 출연하면서,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많이 친해졌고, 그 분이 소개시켜준 것인지 미니앨범의 크레딧엔 익숙한 이름들이 자주 보였다. 나는 그 미니앨범의 모든 곡을 사랑했다. 그 곡들에 담겨있던 설렘, 아픔, 반항심, 똘끼를 사랑했다. (지금은 버렸지만)앨범을 구매했고 듣고 또 들었다.

그랬었는데... 그는 몇년 뒤 성범죄자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덕후까진 아니었고, 라이트한 팬 정도였지만 그래도 배신감이 적지 않았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내 최애가 걱정되었다. 영화 <성덕>의 오세연 감독은 그의 '성덕'이었다. 팬싸인회에 가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도 가수가 이름을 써주는. 다른 누군가의 덕후가 되어본 사람으로서, 내 삶과 인간관계가 그를 중심으로 재편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화에 유독 기차 타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기차를 타고 최애를 만나러 가는 그 마음이 느껴져서 나는 마음아팠다. 범죄 사실이 드러나고 얼마나 상실감이 컸을지. 연예인은 일반인인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지만서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만큼 범죄 사실이 밝혀졌을 때 더 비난 받게 되고,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다.

'먼지가 되어'와 함께 나타났던 그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슈퍼스타K4, '먼지가 되어' 캡쳐


감독님이 정준영의 팬이었다는 건 우연히 알고 봤어서 정준영 얘기가 나올 것이란 건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지만, 영화는 그 뿐 아니라 다른 성범죄자 연예인과 그 덕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영화 중반부에 또 나를 많이 위로했던, 하지만 성범죄자가 된 이의 덕후가 나와서, 깜짝 놀랐으면서도 참담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 외국 생활을 할 때 외로웠던 내 마음을 많이 달래주었던 사람이 성범죄자라니.

어두운 얘기를 늘어놓았지만 영화 <성덕>은 최소 10분에 한번 빵터지는 장면이 있는 블랙 코미디 영화다. 술 없인 할 수 없는 얘기라며 요거트 막걸리를 만들어 마시자는 장면에서 터져버린 웃음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간접적인 피해자이자, 본인이 가해에 가담한 것은 아닐지 고민하는, 최애를 향한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성덕들을 위한 웃음치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여기서 이 사람이 나온다고?', '이 얘기를 이렇게 풀어간다니?' 하면서 웃기는 장면이 많아 등장인물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스포가 될 수도 있는 영화라 이만 줄이겠다. 영화 내용은 극장에서 많이 확인해주셨으면 좋겠다.

<시놉시스>
10대 시절을 바쳤지만 스타에서 범죄로 추락한 오빠! 좋아해서 행복했고 좋아해서 고통받는 실패한 덕후들을 찾아 나선 X-성덕의 덕심 덕질기를 담은, 2022년 실패 없을 올해의 최애작!

Posted by 퍼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