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2019. 12. 7. 22:26

머리를 자를 때 생겼던 일

 

머리를 짧게 잘랐다. 머리를 잘라본 경험은 많지만, 이렇게까지 피곤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머리를 자르러 가기 전, 나는 근처에 있는 미용실 중 남성 커트비와 여성 커트비가 같은 곳을 찾아보았다. 여성 커트비가 이유 없이 더 높다는 기사에 달렸던, 자기는 그런 곳 본 적 없단 댓글이 무색하게도,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수많은 미용실 중 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여성 커트비가 3천원에서 5천원정도 높았다. 어쨌든 나는 두 군데 중 더 비싸고 후기도 좋은 곳으로 갔다. 비싸지만 돈을 더 받아도 거기서 머리를 자를 것이라는 후기가 여러 개 있어서 마음이 홀랑 넘어갔었다.

 

여남 커트비가 같은 곳이라면 왠지 미용사도 젠더 감수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왜 그런 쓸데없는 노력을 했는가.. 긴 생머리에 C컬을 넣는 게 더 좋겠다고 하는 미용사의 말에 나는 숏컷을 할 것이라 했고, 미용사는 "남자친구가 허락해 줬어요?" 라고 물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싸우고 싶진 않았다. 싸웠다가 미용사가 내 머리를 이상하게 잘라놓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래서 "허락이 필요한 문제는 아니니까요^^" 라고 대답했다. 돌이켜봐도 잘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네/아니오를 묻는 질문에 제 3의 선택지로 답하는 것이 굉장히 페미니스트다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치만 "남자들은 보통 머리 긴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라는 말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가요 하하.. 라고 했는데 뭐라고 답을 하는게 좋았을까 싶다. 저는 짧은 머리가 좋은걸요. 정도로 이야기할걸 그랬나. 왜 숏컷을 하기로 했냐고도 물어봐서, 새벽에 출근하니 머리 감고 말리는 시간이 길어서라고 대답했다.

 

미용사분은 빻은 이야기를 좀 하긴 했지만, 앞머리를 만들지 말지 모르겠다는 나의 말에 "제가 알아서 해드릴게요." 라고 했을 땐 신뢰도가 확 올라갔다. 그 말을 하고 나서부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는데, 행여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나는 말을 걸지 않았고, 그분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머리를 다 잘라갈 때 미용사는 나에게 염색이나 펌은 안하시냐고 했다. 나는 일 끝나고 와서 운동하고 씻고 나면 잘 시간인데 염색이나 펌은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아보니 나의 검은 머리가 가장 잘 어울리니까 염색하지 말라고 했다고도 말했다. 이어진 미용사의 말이 충격이었는데, "염색을 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안그래도 숏컷해서 무서운데 검은 머리면 더 무서워요." 난 그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어쨌든 커트가 끝이나고 결제를 하고 미용실을 나섰다.

 

다음에 또 오라며 명함을 주셨지만 그 미용실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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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아주짧은글2019. 11. 17. 21:44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들을, 어딘가에 기록해둬야겠다는 생각. 그래서 나중에 언제고 들춰보면서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일기장을 만들었고, 대학을 다니면서는 4권?5권? 정도의 노트를 채웠던 것 같다.

나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기록하고 싶었고, 그래서 작고 가볍고 예쁜 노트를 고르는데 많은 힘을 썼었다. 하지만 난 손목이 안좋고.. 종이에 쓴 글은 수정이 어렵고. 아무리 편한 노트라도 스마트폰보다는 손에 잡히지 않고. 그러다보니 일기 쓰는 건 차일피일 미뤄지고.

지금은 에버노트에 쓰지만 사실 고양이 일러스트가 그려진 작은 노트도 있다. 블루투스 키보드로 에버노트에 글 쓰는 것, 화면을 터치해 기록해놓는 것, 노트에 쓰는 것 모두 느낌이 다르기에 어떤 방법으로 내 생각과 감정을 기록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단권화를 해야 연대기 같은.. 것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그러다보면 고민하는데 에너지를 쓰느라 정작 기록을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생기곤 했다. 

그치만 이제 단권화에 대한 강박을 버려 보려고. 미래에 찾아보기 힘들더라도, 어디엔가 기록해둔다면 휘발되지 않고 남아있다가 우연히 발견될 가능성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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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18. 8. 28. 23:32

다이어트를 그만둔 이유


작년 9월쯤이었던가. 나는 맥도날드에서 빅맥 세트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감자튀김이 맛이 없었다. 그때 난 다이어트를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먹는 걸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릴 때부터 단 한 번도 날씬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 2차 성징을 겪으며 보통 체형 정도가 되긴 했지만, 그때도 나는 스스로가 살쪘다 생각했었고, 그 잠깐의 뚱뚱하지 않았던 순간조차도 고입 대비와 끊임없는 야식 때문에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그렇지만 맘 편히 먹는 것은 어려웠다. 가족과 식사를 할 땐 엄마가 그만 먹으라 하고 오빠새끼가 뚱뚱하다 놀린대도 마음 편히 먹었지만, 급식을 먹을 땐 다른 친구들에 비해 많이 먹는 게, 내가 뚱뚱한 원인을 적나라하게 공개하는 것 같아서 애써 식욕을 참고 먹을 것을 남기곤 했다. 아무래도 급식은 식판에 1인분 정량을 배식받으니 먹는 양이 정확히 비교되어 괜히 마음이 더 불편했던 것 같다.


몸을 망치는 다이어트 이후 나는 헬스장에서 퍼스널 트레이닝(PT)을 받았다. 그때 트레이너에게 식단 조절 방법을 배웠다. 다이어트식은 탄수화물(밥, 고구마 등)+단백질(고기, 두부, 생선, 달걀)+야채 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PT를 받으며 나는 내가 먹는 모든 것을 사진 찍어 그때그때 트레이너에게 카톡으로 보내야 했다. 2개월 뒤, 나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게 되어 잠시 다이어트를 쉬었다. 쉬는 기간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했었다.


작년 여름방학 때, 딱히 뾰족한 계기는 없었지만 나는 다시 한번 본격적인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 사 먹는 것 이외의 외식은 일주일에 한 번, 그 외엔 집에서 닭가슴살과 야채, 현미밥을 먹었다. 나는 야채 종류, 특히 토마토, 파프리카 같은 걸 싫어해서 그나마 먹을 만한 야채는 양상추, 양배추, 상추 정도였다. (PT를 받을 당시 트레이너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굳이 토마토 같은 걸 먹을 필요는 없다고 했었다) 거기다 드레싱을 잔뜩 뿌려 먹었다. 그래야 먹을 만하니까. 이 정도도 못 하는 다이어트를 하면서 나 자신을 혹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끼니 시간 즈음 이외엔 배가 고프진 않았다. 굶지 않고 잘 챙겨 먹었으니까. 엄격하지만 혹독하진 않았다. 69kg이 되면 두끼떡볶이에 가서 떡볶이를 잔뜩 먹겠다는 생각을 하며 버텼다. 내 자제력이 얼마나 놀라웠냐면, 작년 8월 한국여성학회 캠프에서 야식으로 피자가 나왔는데도 입도 대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엔 참았던 거였지만 식이조절을 하고, 운동하러 가는 건 점차 습관이 되어갔다.


그렇게 나는 점점 살이 빠졌다. 극적으로 살이 빠지진 않았지만 다이어트 기간이 길어지니 옷 사이즈가 줄어갔다. 나는 닭가슴살의 촉촉함을 느끼고 있었고, 양상추에 뿌리는 드레싱도 점점 양이 적어지고 있었다. 라면 먹는 게 더 이상 좋지 않았고 자주 가던 떡볶이집의 떡볶이가 자극적이라 느껴졌다. 내 체형도, 입맛도 변해갔다.


내가 좋아하는 건 그런거였다. 고기, 기름진 것, 크림, 치즈, 버터, 하얀 음식들...빵과 면, 떡... 다이어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음식들이 나는 좋았다. 다이어트 음식을 먹는 건, 어쩔 수 없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의 부역자인 내가, '뚱뚱해도 괜찮아! 내 몸이 들어가는 옷을 옷가게에서 살 수 없는 건 패션 산업의 잘못이야!' 하고 소리치는 내면의 페미니스트를 달래가며 빻은 사회와 타협하는 과정이었다.


입맛이 변하는 건, 나를 잊어가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먹는게 즐겁지 않았다. 그러다 오랜만에 맥도날드에서 감자튀김을 먹었다. 짜고 맛없었다. 그 때 충격을 받았다. 맥도날드 감자튀김이 너무 좋아서 항상 햄버거 단품이나 콤보가 아닌, 세트 메뉴를 시키던 나였는데. 혼란이 왔다. 타협이고 절제일 뿐이라 생각했던 것이 나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난 다이어트를 관두고 그냥 맛있는 거 먹으면서 나름대로 몸과 마음의 건강을 관리하며 살고 있다. 어쩌면 '69kg 이 되면 두끼떡볶이에 가야지'하고 다짐했던 때가 아득할 정도로, 지금은 객관적으로 뚱뚱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타협' 없이, 망설임 없이 엄격한 다이어트를 그만둘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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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