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짧은글2025. 5. 18. 23:38

죄책감 없이 무료함을 즐기는 주말, 인스타 돋보기탭을 보다가 '신혼여행은 무조건 휴양지로 가라'라는 썸네일을 클릭해보았다. 여행사 계정에서 휴양지로 분류되는 여행지를 추천해주는 게시글이었다. 별로 인상깊지 않았던건지 어떤 곳들이 소개되어 있었는지 크게 기억나진 않지만 다낭, 괌 같은 해변 도시들이 소개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결혼식을 준비하는 커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헤메를 받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다보면 피곤해지기 때문에 많이 걷지 않아도 되고 쉬어갈 수 있는 여행지를 추천해주는 것이겠지.

나도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휴양지 여행은 별로 가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반년간 교환학생으로 유럽에 살면서, 유럽여행을 많이 했었는데 오페라, 뮤지컬,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는 걸 가장 좋아했고 저녁이면 도시 이곳저곳의 바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스몰토크 하는 걸 즐겼었다. 미술관도 많이 갔는데 그땐 기독교에 거부감이 심했어서 성화를 빼고 전체 전시품의 3분의 1정도만 감상하곤 했었다.

살면서 휴양지라 할 만한 곳을 딱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이었다. 혼자 갔던 여행이었고 이아마을의 석양이 아름답다고 해서, 산토리니의 동키 맥주를 한병 사서 호텔 선베드에 누워 석맥(!)을 할 계획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어쩌다보니 나는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와인을 많이 마셔서 만취했고, 길을 못 찾아서 힘겹게 호텔로 돌아갔었다. 그땐 '도파민 중독'같은 단어는 없었지만 나는 그때부터 도파민을 찾는 사람이었고 휴양지에서조차 도파민을 창조해냈네.

그러고보면 휴양지란 무엇일까. 보통은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수욕장이 있는 도시에 가서 스노쿨링이나 수상레저를 즐기는 여행을 휴양이라 부르던데,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맛집카페전시공연을 즐기는 것보다 물놀이가 더 힘들지 않을까? 아무래도 물 속에서 체온을 유지하려면 열량도 더 소모해야 되고 말이다. 아직 안 해봐서 그렇지, 나도 휴양지 여행을 갔다오면 생각이 달라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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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아주짧은글2025. 5. 17. 23:56

며칠 전에 우리 회사 프론트엔드 개발자랑 커피를 한 잔 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고 제법 친한 동료인데 마침 둘다 짬이 나서였다.

회사 앞 카페에 들어가서 키오스크로 커피를 주문하는데, 신용카드 결제 화면으로 넘어가는 방법을 찾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우리가 명색이 테크 종사자인데 우리도 이렇게 버벅일 정도면 다른 사람들, 특히 노인들은 얼마나 어려울까? 라고 물으니 사실 이 정도면 양반이고 맥도날드 키오스크는 더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러 식당, 카페에서 주문을 키오스크로 받게 되고 노인들이 주문하기 어려워한다는 문제 제기는 기사나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 몇 차례 접했다. 하지만 키오스크 앞에서 뚝딱거리다보니 키오스크 사용을 어려워하는게 꼭 나이를 먹어서 신문물에 적응하기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UI/UX를 제대로 디자인하지 않아서 여남노소 누구나 사용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생각해보면 지금 70대 이상이신 분들도 커피 자판기같은 건 다들 써보신 적이 있었을텐데.

2주 전에는 입덕 40년이 넘은 올비팬들이 온라인 예매를 어려워해서 KBO에서 현장 판매를 시작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올비님들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봐서 좋았고 꼭 필요한 티켓 판매 정책이라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나이를 먹어서 새로운 방식에 적응하지 못할까봐 걱정스러웠다. 요즘 청소년들은 PC를 잘 안쓰다보니 키보드로 타자치는 걸 어려워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봤는데, 몇십년이 지나서 나는 탈덕하지 않았는데 핸드폰으로만 티켓팅이 가능하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적응해야 될까? 그래도 나는 새로운 전자기기 써보는 것도 좋아하고 하니까 신문물에 잘 적응해나가려나...

그런 걱정이 들어서 오늘 쓰는 글은 스마트폰으로 작성해보았다. 화상 쿼티 키보드로 작성하다보니 확실히 기계식 키보드로 쓰는 것보다 타자 속도가 느리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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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아주짧은글2025. 5. 16. 23:51

월요일에 썼던 '관크 후기'를 친구들 몇 명이 있는 카톡방에 공유했었다. 영화 후기 쓰기 전에 관크 후기를 먼저 쓰게 되었고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고 싶은 내 입을 막았던 건 영화관에서 이렇게 떠드는 사람들이 관람 매너를 이야기하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있어서였다는 말과 함께.

카톡방에 있던 친구가, 자신도 최근에 관크를 경험해서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했고, 자신도 그런 말을 할때면 떨리지만 보통은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조용히 한다고 이야기해줬다. 나의 의구심을 깨준, '승리의 경험' 공유의 현장이었다. 큰 용기가 생겼다.

예전에 들었던 강연에서 민주노총 소속의 어떤 노조 조합원이 본인 사업장에서 노동 문제에 대응했던 경험을 말씀해주셨었는데, 그 분들은 성희롱이나 무례한 언어에 자주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서 노동하신다고 했다. 조합원분들은 참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피해를 당했을 때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같은 대응의 언어가 바로바로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았고 조합원들이 다같이 모여서 역할극으로 연습을 했다고 하셨다.(충주시 홍보맨의 악성 민원인 대응 영상같은 그런 역할극) 그 강연 내용이 생각났던 나는 5일동안 애인님과 역할을 바꿔가며 "조용히 하세요"라고 말하는 연습을 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지하철(지옥철)을 탔는데, 출입구로 들어갈 때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이 손가락으로 내 허리를 찌르면서 움직였다. 오른손과 왼손 모두를 검지만 펴서 찌르는게 느껴지던 순간, 나는 뒤돌아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밀지 마세요!"라고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찌르지 마세요!"라고 말했다면 더 정확했겠지만, 어쨌든 그 순간 허리를 찌르던 촉감이 없어졌다. 날 찌르던 사람은 몇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줄곧 내 뒤에 있다가, 나의 앞쪽에서 열리는 문으로 먼저 내리려고 했다. 뒤를 쓱 돌아보니 그 사람은 또 손을 올렸는데 나랑 눈이 마주치니까 손을 내리고 "내릴게요." 라고 말을 했다. 누군가에겐 별일 아닌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드디어 나에게 필요한 한마디를 말해내었다. 기특한 내가 또 한단계 성장을 이뤄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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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