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책이야기2017. 6. 27. 02:00

<82년생 김지영>


세간의 화제(?)인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읽고 울었다는 후기들을 많이 봐서 나도 눈물줄줄 할까봐 자기 전 침대 위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읽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다. 그저 화가 났다. 김지영 씨의 삶이 내가 살아온 삶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김지영 씨가 만난 여자들 중엔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쩌면 나의 삶보다 더 진보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지영 씨보다 열 댓 살은 어린데 말이다.


이내 막막해졌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이 김지영 씨의 삶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듯, 앞으로의 삶도 김지영 씨의 삶과 다르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지영 씨가 김지영 씨의 어머니와 별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듯, 김지영 씨의 딸도 김지영 씨와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에서, 시대속에서 애써 진보를 찾아보게 된다. 어려서부터 돈을 벌어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어야 했던 김지영 씨의 어머니와는 다르게 김지영 씨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 뿐이다. 세대가 교체된 것에 비해 너무 작은 변화이지 않은가.


답답하고 부당하고 나를 분노케 했던 김지영 씨의 연대기를 들은 사람들도 그 부조리를 인지하나, 본인이 부조리에 가담하고 있으며 그것에 맞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이 현실이다. 세상은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여성은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이 해방되지 않으면 개인의 해방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으로 지정된 사람들은 모두 삶의 어느 순간에 부조리를 깨닫고 좌절하는 순간을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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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써야 할까, 말아야 할까?>



여의도의 많은 사람들이 영남 사투리를 구사하는 게 계속해서 전파를 타면서 트위터에서 영남/호남 사투리에 관련된 논의가 이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논의를 다 따라가지도 못했고 어디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이야기를 풀어놓고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들어보고 싶었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영남지역에 살다가 졸업 후에 경기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바람에 경기도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에 살기 시작한지 2년 째에 사투리를 ‘고치게’ 되었다.


새터에서 사투리를 쓰지 않는 경상도 출신 선배들을 보며 ‘나는 의리있게! 계속 사투리를 써야지’ 하고 생각했고, 실제로 1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대학생활을 하면서도 말투를 고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 학교의 굉장히 많은 학생들이 영남 출신이었고 사투리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그들 사이에서 나 역시 사투리를 쓰는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들 전라도 사투리는 쉽게 고칠 수 있어도 경상도 사투리는 고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나는 서울말을 연습하게 되었다. 영남패권주의라든지, 서울중심주의라든지 하는 권력관계에 관한 고민과는 관련 없는, 정말로 단순한 계기 때문이었다.(궁금한 사람은 얼굴 보고 물어보면 말해드림 아무도 궁금해하진 않겠지만…)


수도권에 살면서 사투리가 아닌, 서울말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편했다. 예전엔 옷가게, 식당, 백화점 같은 곳에서 일하는, 처음 만난 사람들까지도 꼭 내 고향을 물어보곤 했는데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내가 말을 하면 따라하면서 놀리거나 사투리를 고치는 것이 어렵냐며 서울말을 써보라고 하는 사람들도 없어졌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여자는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서울남자들이 좋아한다며 대상화되는 일도 없어졌다.(어쩌면 낯선 지방에 사는, 어수룩한, 내가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투리를 쓰는 게 귀엽게 받아들여지는 게 아닐까)


누군가 나에게 고향을 물어봐서 수원 출신이라 대답해도 내 말투 때문에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없어질 때쯤, 나는 내 고향인 경남 지역에 비해 서울, 경기지역이 훨씬 진보적이고 선진적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내 고향을 밝히는 것을 창피해하게 되었다. (많은 풍파가 있었을지라도) 전국 대부분의 시,도에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될 때, 경남에서는 조례 발의 후에 통과는 커녕 이슈조차 되지 않았다. 내 친구들은 아무도 학생인권운동에 관심이 없었고, 관심이 있는 학우는 '학생인권'이라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아침 조회 시간에 지각을 하면 줄서서 종아리를 맞았는데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동갑내기 친구는 자기 학교에선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선거 결과를 보면 수도권과 영남 지방의 색은 크게 차이가 났다. 작년 연말, 서울 사람들은 가족 단위로 집회에 나가고, 수도권의 아줌마 아저씨들은 집회에 다녀온 우리들에게 박수를 쳐줬는데 내 고향의 사람들은 뉴스를 보며 시끄러운 시위대를 욕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내 고향이 부끄러웠고, 지역 이름으로 라벨링되고 싶지 않았다. 누가 출신지를 물어보면 수원 출신이라 대답했다. 실제로 나는 수원에서 지낼 때 가장 편했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과거의 어느 날에 서울에서 있었던 어떤 행사에 참여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발언하는 사람들 중에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투리를 쓰는 타자의 존재를 축소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대한민국의 모든 것은 서울을 기준으로 돌아간다. 서울에 첫눈이 와야 한국에 첫눈이 온 것이고, 랜선친구들은 대부분 수도권에 산다고 가정한다. SNS에서 맛집이나 강연 소식을 보면 당연히 서울일 것이라 생각된다. 나의 출신지가 (차별받는지는 모르겠지만) 타자화되는 지역임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권에 사는 내가 영남 사투리를 고수하는 것도 어떠한 정치적 의미를 담을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내가 요즘 다시 사투리를 쓸까 고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 내 모습이 너무 낯설기 때문이다. 짧은 인생의 대부분을 사투리를 구사하며 보냈다. 표준어로 말하기 위해서 나는 마치 외국어를 쓸 때처럼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어쩌면 이게 더 바람직한 언어사용 습관인걸까…) 그래서일까 고등학교 때까지 만난 친구들에게 나는 막말을 서슴없이 하고, 욕을 잘 하고, 어딘가 모자란 친구인데 대학에 와서 만난 친구들은 내가 화나는 일이 있어 욕을 내뱉으면 깜짝깜짝 놀라더라.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대학와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성실히 공부하고 알아서 할 일 잘 하는 사람인걸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내가 느낀 바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앞으로 어떤 종류의 한국말을 내뱉으며 살아야 하는걸까? 익숙하지만 불편한? 낯설지만 편한? 사투리를 계속 쓸지 고민할 수 있는 것도 내가 호남 출신이 아니라 영남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고민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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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아주짧은글2017. 6. 24. 10:46


나는 울지 않았는데 함께 관람했던 사람들이 영화 내내 울었다.

길고양이들과 인간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려면 무해한 음모 수준의 계획을 은밀히 진행해봐야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언젠가는 한국의 길냥이들도, 인간을 무서워 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ㅋㅋ) 날이 오겠지. 오스트리아에서 만났던 길고양이들처럼.

*영화관에서 포스터를 갖고 오고 싶었는데 포스터가 없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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