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어쩌나. 또 야근이다. 작년부터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야근의 축복이 끊이지 않는다. 늦게 퇴근하는 것에 대해 울분을 갖지 않으려고 했는데 샌드위치 휴일이라고 남들이 놀 때 야근하고 있으려니, 1분 1초 흘러갈 때마다 속이 바짝바짝 탔다. 무엇보다도 오늘 애인님과 저녁을 먹고 싶었는데 야근하게 되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게 되어 너무 화가 난다. 커리어, 성장 그딴 것엔 관심 없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1순위로 두며 살고 싶었는데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지난 달 부터는 퇴근길 택시를 탈 때마다 채용 공고 사이트에 들어가고 있다. (퇴근할 때쯤이면 대중교통이 마땅치 않아 택시를 타야한다.) 배운 건 도둑질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도둑질하는 곳 중엔 우리 회사가 나아보인다. 퇴직금 주기 싫어서 11개월 계약직을 뽑는 곳을 보면 짜증이 난다.
남은 업무를 던지고 퇴근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마감 기한은 어떻게 맞추고 망한 실험은 어떻게 수습하나. 기후위기와 헛된 계엄령의 시대에 내가 하는 일은 그냥 장난같아서, 내가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지만.
4월엔 주 52시간을 넘겨 일했다. 신기한 건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두운 밤에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퇴근하는 게 좋았다. 대학생 때 시험기간이 되면 피곤하면서도 편안한 기분이었던 것과 같았다. 업무에만 집중하고 그 외에 어른의 과제들 - 건강한 식사, 보험, 재테크, 가사노동, 운동, 자기돌봄, 정치 문제 같은 것들 - 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면 자취방이 아주 더러워져서 오랫동안 대청소를 해야 되었던 것처럼, 업무만 하느라 다른 것들을 챙기지 않으면 후폭풍이 올 거라는 것을 알아서 두렵기도 하다.
너무 피곤하고, 놀고싶어서 그만두고 싶을 땐,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했던 과거가 힘이 되어주었다. 집에 사채업자들이 찾아와서, 아버지의 행방을 모른다고 거짓말 했던 기억, 겨울이 되면 화장실에 물이 나오지 않아 목욕탕에 가서 씻어야 했던 기억, 밤늦게 수학 문제를 풀고 있다보면 바퀴벌레가 날아들던 기억, 1500원짜리 밥버거를 사서 하루 두번 나눠먹던 기억들이, 정확히는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2025년에는 나를 버티게 한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지만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 어쩌면 입으론 투덜거리면서도 지금까지의 짧은 인생 중 지금이 제일 낫다고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참 비겁하고 게으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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