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2020. 11. 23. 22:44

지난 6월이던가 7월이던가. 내 안에서 뭔가가 폭발하듯이 '뚝'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회사에서 업무상 필요한 일을 해야 하는데,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공식적인 업무 요청 없이 다른 동료의 호의만 믿고 업무 지시를 해야만 했다. 동료는 바빠서 연락이 잘 되지 않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사이에 타이밍을 놓쳤다. 어떤 일이었는지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나는 며칠간 긴장해 있었고, 일이 실패하자마자 힘이 쭉 빠졌다.

생각해보면 올해 시작한 이 과제는 계속 이 모양이었다. 아니, 이 부서에 온 작년부터 그랬던가. 아무도 뭘 어떻게 해야할지 가르쳐주지 않았고 나에겐 사수가 없었다. 동기들, 선배들의 호의를 기대하고 이곳저곳에 빌붙다가 실망하기를 거듭했다. 다른 팀으로 간 전임자는 잘못 알려주거나, 자신도 잘 모른다고 하는 일이 많았다. 부장님은 업무 지시를 하고 그 업무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주지 않고, 나는 뭘 잘 모르니까 실수하고 민폐끼치고 혼나게 되는 일도 많았다. 살면서 혼나본 적이 별로 없었어서 더욱 멘붕이었다.

그렇게 몇 달 끙끙거리다보니 번아웃이 오게 되었다. 나는 무기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장기적 목표를 세워본 적이 없었고, 그저 밥을 굶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왔는데, 그래서 이제 굶지 않아도 되는데, 여기서 내가 뭘 더 열심히 해야하지? 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열심히, 또는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들은 무슨 이유가 있길래 같은 월급쟁이인데도 열심히 하는거지? 라고 생각했다.

집중력이 떨어졌다. 글을 읽기가 어려웠고, 서류를 보기가 힘들었다. 숫자를 정리하면서 먹고사는 직업인데 숫자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처럼 글을 쓰는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네이버 웹소설조차 끝까지 읽는게 힘이 들었다. 대부분 단문으로 쓰여져서 예전엔 머리를 비우려고 읽던 웹소설이었는데. 업무 때문에 꼭 읽어야 하는 보고서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고 필사해서 겨우 내용을 숙지했다. 계속 뭔가를 깜빡하고 실수하길 반복했다. 명석하고 똑똑한 나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어느새 바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번아웃에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연 15개의 연차휴가로 충분할리가 없었다.

2주 이상 우울감이 지속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게 좋다고 하던데, 나는 두 달간 무기력함이 지속되어서 정신과를 찾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불안에 대한 병식은 없지만) 처방받아서 두 달간 꼬박꼬박 먹었더니 다행히 기분이 좋아지고 지금처럼 일기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예전처럼 명석하고 똑똑하고 이해력 높은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집중력이 조금은 생겼다! 

번아웃을 겪었던 걸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기록해 본다. 몇년 전, 처음 우울증에 걸렸을땐 완전히 낫기까지 일년 반이 걸렸다. 이번엔 두 달만에 상당히 호전되었다. 치료를 시작하기로 결정한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아직 완전히 좋아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지만 그래도 무사히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다. 처음 만났던 심리상담사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몸이나 마음이 아픈 건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아파지면 나을 때까지 약을 먹으면 되고. 좋아졌다가 다시 아프게 되면 또 약을 먹으면 된다고, 그러면 나을 수 있는 거니까 아프게 되는 것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말을 떠올리면서 걱정은 한켠에 접어 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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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에세이2019. 12. 7. 22:26

머리를 자를 때 생겼던 일

 

머리를 짧게 잘랐다. 머리를 잘라본 경험은 많지만, 이렇게까지 피곤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머리를 자르러 가기 전, 나는 근처에 있는 미용실 중 남성 커트비와 여성 커트비가 같은 곳을 찾아보았다. 여성 커트비가 이유 없이 더 높다는 기사에 달렸던, 자기는 그런 곳 본 적 없단 댓글이 무색하게도, 우리 집 근처에 있는 수많은 미용실 중 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여성 커트비가 3천원에서 5천원정도 높았다. 어쨌든 나는 두 군데 중 더 비싸고 후기도 좋은 곳으로 갔다. 비싸지만 돈을 더 받아도 거기서 머리를 자를 것이라는 후기가 여러 개 있어서 마음이 홀랑 넘어갔었다.

 

여남 커트비가 같은 곳이라면 왠지 미용사도 젠더 감수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일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왜 그런 쓸데없는 노력을 했는가.. 긴 생머리에 C컬을 넣는 게 더 좋겠다고 하는 미용사의 말에 나는 숏컷을 할 것이라 했고, 미용사는 "남자친구가 허락해 줬어요?" 라고 물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싸우고 싶진 않았다. 싸웠다가 미용사가 내 머리를 이상하게 잘라놓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래서 "허락이 필요한 문제는 아니니까요^^" 라고 대답했다. 돌이켜봐도 잘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네/아니오를 묻는 질문에 제 3의 선택지로 답하는 것이 굉장히 페미니스트다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치만 "남자들은 보통 머리 긴 여자를 좋아하잖아요" 라는 말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가요 하하.. 라고 했는데 뭐라고 답을 하는게 좋았을까 싶다. 저는 짧은 머리가 좋은걸요. 정도로 이야기할걸 그랬나. 왜 숏컷을 하기로 했냐고도 물어봐서, 새벽에 출근하니 머리 감고 말리는 시간이 길어서라고 대답했다.

 

미용사분은 빻은 이야기를 좀 하긴 했지만, 앞머리를 만들지 말지 모르겠다는 나의 말에 "제가 알아서 해드릴게요." 라고 했을 땐 신뢰도가 확 올라갔다. 그 말을 하고 나서부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는데, 행여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나는 말을 걸지 않았고, 그분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머리를 다 잘라갈 때 미용사는 나에게 염색이나 펌은 안하시냐고 했다. 나는 일 끝나고 와서 운동하고 씻고 나면 잘 시간인데 염색이나 펌은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아보니 나의 검은 머리가 가장 잘 어울리니까 염색하지 말라고 했다고도 말했다. 이어진 미용사의 말이 충격이었는데, "염색을 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안그래도 숏컷해서 무서운데 검은 머리면 더 무서워요." 난 그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어쨌든 커트가 끝이나고 결제를 하고 미용실을 나섰다.

 

다음에 또 오라며 명함을 주셨지만 그 미용실에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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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아주짧은글2019. 11. 17. 21:44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들을, 어딘가에 기록해둬야겠다는 생각. 그래서 나중에 언제고 들춰보면서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일기장을 만들었고, 대학을 다니면서는 4권?5권? 정도의 노트를 채웠던 것 같다.

나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기록하고 싶었고, 그래서 작고 가볍고 예쁜 노트를 고르는데 많은 힘을 썼었다. 하지만 난 손목이 안좋고.. 종이에 쓴 글은 수정이 어렵고. 아무리 편한 노트라도 스마트폰보다는 손에 잡히지 않고. 그러다보니 일기 쓰는 건 차일피일 미뤄지고.

지금은 에버노트에 쓰지만 사실 고양이 일러스트가 그려진 작은 노트도 있다. 블루투스 키보드로 에버노트에 글 쓰는 것, 화면을 터치해 기록해놓는 것, 노트에 쓰는 것 모두 느낌이 다르기에 어떤 방법으로 내 생각과 감정을 기록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단권화를 해야 연대기 같은.. 것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그러다보면 고민하는데 에너지를 쓰느라 정작 기록을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생기곤 했다. 

그치만 이제 단권화에 대한 강박을 버려 보려고. 미래에 찾아보기 힘들더라도, 어디엔가 기록해둔다면 휘발되지 않고 남아있다가 우연히 발견될 가능성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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