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짧은글2025. 5. 4. 23:50

하루가 통째로 삭제되어 버렸다. 원흉은 어젯밤에 마신 술이었다.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사러 나갔다가 밤 늦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가 SNS에 올린 화이트와인 사진을 봐버렸고 아주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편의점에서 데스페라도스 맥주와 순하리 레몬진 9도짜리 캔 을 사왔다.

어제의 글쓰기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까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술을 사왔으니까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유튜브를 틀어 놓고 빨아놓은 수건을 개면서 안주도 없이 빠르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취하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그런 느낌을 받고 싶어서 술을 마시려고 했던 건데 술이 적었는지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마셔서 그랬는지 제법 멀쩡한 정신으로 잠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머리가 살짝 아픈 것 외에는 괜찮은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술이 깨며 속도 안좋아지고 머리도 더 아파졌다. 해장을 하겠다고 짝꿍과 국밥집에 갔다가 두 입 먹고 못먹겠어서, 수저를 놓고 남은 음식을 포장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누워서 다시 잠에 들었고, 짝꿍은 점심 식사를 마저 했다.

2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는데도 속이 안 좋아서, 약을 챙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이라서 우리 동네에는 문연 약국이 없었고, 옆 동네에 있는 큰 약국에 다녀와야했다. 나는 다시 잠들었고 짝꿍이 자전거를 타고 이런저런 약을 많이 사서 돌아왔다. 술 값은 8000원 정도 썼는데 약 값은 2만원이 넘었다고 한다. 이승윤의 '비싼 숙취'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정말 비싼 숙취네.

약을 먹고 다시 잠들었다가, 먹은 게 없기도 한데 조금이라도 먹었던 건 다 토해서, 배고픔을 느끼면서 일어났다. 죽을 먹어야 될 것 같은데 일요일이라 본죽은 거의 문을 닫아서 택시를 타고 삼계탕집에 가서 닭죽을 먹고 왔다. 집에 오는 길에 좀 걸었더니 소화가 다 돼서 배고파졌다. 지금도 너무 배고픈데 지금 먹으면 야식이라서 좀 참아야 되나 싶다.

주당이었던 과거를 청산하고, 2년 전부터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고, 술은 백해무익하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고있는데, 내가 왜 금주를 시작했는지 상기하게 되는 하루였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바보같은데, 이런 모습이 인간미가 있고 귀엽다며 간병해주는 짝꿍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런저런 할 일과 과제들에 치여 살고 있는 요즘, 숙취가 나를 쉬게 하는 브레이크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다시는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진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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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아주짧은글2025. 5. 3. 23:41

하루 종일 3번째 글의 주제를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오후 11시가 지나버려서 뭐라도 타이핑을 하고 있다.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죄다 부정적인 내용인데, 어제도 우울한 글을 썼다보니 오늘도 안 좋은 얘기를 쓰고 싶진 않았다. 햇살캐가 되고 싶지만 내가 생각하는 방식은 시니컬할 때가 대부분이라 다른 사람을 만나면 말을 조심하려고 노력한다.

오늘 하루는 정말 별 일 없이 흘러갔다. 피곤한데다 주말이니까 늦잠을 자고, 헬스장 마감이 1시간 남았을 때, 더 늦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으로 달려가서 운동을 하고 왔다. 요즘은 야근하느라 헬스장에 자주 못가서 쉬는 날에는 꼭 가려고 한다. 워낙 코어 근육이 약하다보니 운동을 해야 소화가 잘 되어서 운동하기 싫어도 꾸준히 어떤 종목이든 해야 한다.

헬스를 시작한 건 21살 때였는데, 그 전까진 적어도 한달에 한 번씩은 소화불량 때문에 머리가 깨질듯 아프곤 했다. 그때만 해도 웨이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많이 없었어서, PT를 받으면서 운동을 했었다. 운동을 하니깐 밥 먹고 체하는 일이 없어져서 지금까지 아파했던 시간이 아까워졌다. 좀 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텐데. 웨이트가 아니더라도 학생 때부터 운동을 했으면 좋았을 것 같지만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데 시간을 쓰느라, 그리고 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해서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웨이트를 하는 것이 좀 더 흔한 일이 되었다. 우리 동네에는 헬스장이 1군데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10개가 넘는다. PT를 받지 않아도, 머신 사용법을 알려주고 홈트 프로그램을 짜주는 선생님들이 있다. 아직도 운동이 즐겁진 않고, 해야하니까 하는 나지만 웨이트는 혼자서 하는 실내운동이라 그나마 다른 종목보다는 할만하다. 그래도 운동을 하면 몸도 마음도 좋아지니까, 웨이트의 대중화는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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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
아주짧은글2025. 5. 2. 21:32

이걸 어쩌나. 또 야근이다. 작년부터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야근의 축복이 끊이지 않는다. 늦게 퇴근하는 것에 대해 울분을 갖지 않으려고 했는데 샌드위치 휴일이라고 남들이 놀 때 야근하고 있으려니, 1분 1초 흘러갈 때마다 속이 바짝바짝 탔다. 무엇보다도 오늘 애인님과 저녁을 먹고 싶었는데 야근하게 되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게 되어 너무 화가 난다. 커리어, 성장 그딴 것엔 관심 없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1순위로 두며 살고 싶었는데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지난 달 부터는 퇴근길 택시를 탈 때마다 채용 공고 사이트에 들어가고 있다. (퇴근할 때쯤이면 대중교통이 마땅치 않아 택시를 타야한다.) 배운 건 도둑질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도둑질하는 곳 중엔 우리 회사가 나아보인다. 퇴직금 주기 싫어서 11개월 계약직을 뽑는 곳을 보면 짜증이 난다.

남은 업무를 던지고 퇴근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마감 기한은 어떻게 맞추고 망한 실험은 어떻게 수습하나. 기후위기와 헛된 계엄령의 시대에 내가 하는 일은 그냥 장난같아서, 내가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지만.

4월엔 주 52시간을 넘겨 일했다. 신기한 건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두운 밤에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퇴근하는 게 좋았다. 대학생 때 시험기간이 되면 피곤하면서도 편안한 기분이었던 것과 같았다. 업무에만 집중하고 그 외에 어른의 과제들 -  건강한 식사, 보험, 재테크, 가사노동, 운동, 자기돌봄, 정치 문제 같은 것들 - 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면 자취방이 아주 더러워져서 오랫동안 대청소를 해야 되었던 것처럼, 업무만 하느라 다른 것들을 챙기지 않으면 후폭풍이 올 거라는 것을 알아서 두렵기도 하다.

너무 피곤하고, 놀고싶어서 그만두고 싶을 땐,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했던 과거가 힘이 되어주었다. 집에 사채업자들이 찾아와서, 아버지의 행방을 모른다고 거짓말 했던 기억, 겨울이 되면 화장실에 물이 나오지 않아 목욕탕에 가서 씻어야 했던 기억, 밤늦게 수학 문제를 풀고 있다보면 바퀴벌레가 날아들던 기억, 1500원짜리 밥버거를 사서 하루 두번 나눠먹던 기억들이, 정확히는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2025년에는 나를 버티게 한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지만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 어쩌면 입으론 투덜거리면서도 지금까지의 짧은 인생 중 지금이 제일 낫다고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참 비겁하고 게으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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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퍼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