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통째로 삭제되어 버렸다. 원흉은 어젯밤에 마신 술이었다.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사러 나갔다가 밤 늦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가 SNS에 올린 화이트와인 사진을 봐버렸고 아주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편의점에서 데스페라도스 맥주와 순하리 레몬진 9도짜리 캔 을 사왔다.
어제의 글쓰기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까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술을 사왔으니까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유튜브를 틀어 놓고 빨아놓은 수건을 개면서 안주도 없이 빠르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취하면서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그런 느낌을 받고 싶어서 술을 마시려고 했던 건데 술이 적었는지 아니면 너무 오랜만에 마셔서 그랬는지 제법 멀쩡한 정신으로 잠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머리가 살짝 아픈 것 외에는 괜찮은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술이 깨며 속도 안좋아지고 머리도 더 아파졌다. 해장을 하겠다고 짝꿍과 국밥집에 갔다가 두 입 먹고 못먹겠어서, 수저를 놓고 남은 음식을 포장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누워서 다시 잠에 들었고, 짝꿍은 점심 식사를 마저 했다.
2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는데도 속이 안 좋아서, 약을 챙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이라서 우리 동네에는 문연 약국이 없었고, 옆 동네에 있는 큰 약국에 다녀와야했다. 나는 다시 잠들었고 짝꿍이 자전거를 타고 이런저런 약을 많이 사서 돌아왔다. 술 값은 8000원 정도 썼는데 약 값은 2만원이 넘었다고 한다. 이승윤의 '비싼 숙취'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정말 비싼 숙취네.
약을 먹고 다시 잠들었다가, 먹은 게 없기도 한데 조금이라도 먹었던 건 다 토해서, 배고픔을 느끼면서 일어났다. 죽을 먹어야 될 것 같은데 일요일이라 본죽은 거의 문을 닫아서 택시를 타고 삼계탕집에 가서 닭죽을 먹고 왔다. 집에 오는 길에 좀 걸었더니 소화가 다 돼서 배고파졌다. 지금도 너무 배고픈데 지금 먹으면 야식이라서 좀 참아야 되나 싶다.
주당이었던 과거를 청산하고, 2년 전부터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고, 술은 백해무익하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고있는데, 내가 왜 금주를 시작했는지 상기하게 되는 하루였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바보같은데, 이런 모습이 인간미가 있고 귀엽다며 간병해주는 짝꿍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런저런 할 일과 과제들에 치여 살고 있는 요즘, 숙취가 나를 쉬게 하는 브레이크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다시는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진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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